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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인의 현대사 기록, 조선의 대표 역사서가 되다

1392년(태조 1) ~ 1863년(철종 14)

조선왕조실록 대표 이미지

조선왕조실록(정족산사고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25대 국왕의 실록 28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전체 1,893권 888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사실을 망라한다. 다만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하여 왜곡이 많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으며, 세계기록유산 등재에도 제외되었다.

2 실록은 언제부터 편찬되었나

실록은 역대 제왕의 사적(事績)을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실록이라는 명칭은 6세기경 중국 남조 양(梁)의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황제실록(皇帝實錄)』에서 유래하는데, 당과 송을 거치면서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당의 실록 일부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실록이 편찬되었다. 『고려사』에 고려의 『태조실록』에 대한 기록이 있고, 감수국사(監修國史) 등에게 실록을 편찬하게 했다는 기록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 공민왕부터 공양왕까지의 실록을 편찬했고, 세종대에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실록을 참고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3 조선 『태조실록』에서부터 『철종실록』까지

조선왕조실록 28종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에서부터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실록(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까지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각 실록 명칭은 국왕의 묘호(廟號)를 앞에, 시호(諡號)를 그 뒤로 배열하여 지었다. 조선 후기에는 시호를 여러 차례 올리면서 길어졌기 때문에 실록 명칭 역시 길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태조실록』, 『철종실록』과 같이 묘호만 붙인 실록 명칭을 사용한다.

한편,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된 국왕이기 때문에 실록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다.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와 같이 제목은 다르지만, 서술 체제는 다른 실록과 같다. 이 중 『광해군일기』는 인간(印刊)되지 못하고 정초본(正草本)과 중초본(中草本)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중초본에는 최종 검토를 하면서 줄이거나 삭제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중초-정초로 이어지는 실록 편찬 과정의 내막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몇몇 실록은 수정되기도 했다. 광해군대 편찬된 『선조실록』은 효종대에 수정되어 『선조수정실록』이 별도로 존재하고, 숙종 즉위 후의 『현종실록』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 『현종개수실록』으로 개수(改修)된 판본이 별도로 존재한다. 그리고 영조 즉위 후 간행된 『경종실록』은 집권세력인 노론의 비판으로 인해 『경종수정실록』으로 수정된 판본이 별도로 있다.

조선 후기 붕당의 대립은 실록의 편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숙종실록』의 편찬은 약 10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그 사이 경종의 사망과 영조의 즉위가 이루어지면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었고,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 후에는 소론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론의 요구로 각 권의 끝에 잘못되거나 빠진 기사를 모아 ‘보궐정오(補闕正誤)’를 붙이게 되었는데, 이 역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 양상이 드러난 결과이다. 이 두 실록은 모두 전해지므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입장 차이를 서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4 조선왕조는 왜 실록을 편찬했나

전통적으로 유교적 역사의식이 강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역대 국왕의 기록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실록을 편찬해 왔다. 따라서 국왕 재위기간 동안 매일매일의 일을 기록해 두는 준비 작업이 필요했고, 이는 실록뿐 아니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의 편찬에도 반영되었다.

실록은 당대의 ‘현대사’ 기록이었다. 실록은 국왕이 사망한 뒤 후계 국왕이 즉위한 이후 실록청 신료들이 선왕 때의 사초를 모아 편찬한 것으로, 편찬 과정에서 당대의 복잡한 정치권력의 향배가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 바뀌었어도 선왕과 정치적 공동체였던 신하들 상당수가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이는 실록 편찬 방향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은 과거 조선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반영된 ‘현대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록 편찬은 정치에 대한 참여 방식이기도 했다. 사관(史官)이 국왕의 지근거리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 것은 권력 남용을 제약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국왕은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말에서 떨어졌을 때 관련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정작 사관은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도 기록하였다.

5 사관, 실록을 만든 사람들

실록 편찬을 담당했던 사관 구성은 모두 겸직제로 이루어졌다. 우선 ‘한림 8원’에 해당하는 예문관의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검열(檢閱) 4명은 춘추관의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였다. 이들은 임금의 가까이에서 보고 들은 국정 전반의 내용을 사초(史草)로 기록하였다. 사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역사 평가나 비밀스러운 사항이 적힌 것은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훗날 실록 편찬시에 제출한다.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고 한다.

사관의 겸직제는 세종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준에 따르면, 영의정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좌·우의정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하였다. 육조의 판서 중 2원은 지춘추관사, 참판 중 2원은 동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수찬관(修贊官), 편수관(編修官), 기주관(記注官), 기사관(記事官) 등의 임무를 의정부, 홍문관, 시강원, 사헌부, 사간원 등의 관원들이 겸춘추(兼春秋)의 직임을 띠고 수행하였다.

사관은 사초를 쓰는 것에서부터 실록을 편찬하는 일까지 담당함으로써 조선의 역사 기록을 담당하였다. 이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원칙은 직서주의(直書主義)였다. 임의로 사초를 도려내거나 긁어없애거나 먹으로 지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졌다. 간혹 개작(改作)의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일부에서는 개작했다는 점을 밝혀두기도 했다. 원칙적으로 사관들은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사필(史筆)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역사를 서술하였다.

6 초초, 중초, 정초를 거치는 편찬 과정

실록을 본격적으로 편찬하게 되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가장 먼저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편찬을 맡은 관료들을 임명하였다. 그러면 사료를 수집하는데, 사초와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 조보(朝報), 일기, 문집 등이 망라된다. 광해군대 선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주요 전적이 대거 불타버려서 왜란 이전의 기록을 서술하기 위해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비롯하여 각 관료의 집에 보관된 조보, 일기 등을 찾아내 사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각종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초초(初草)를 완성하면, 그것을 다시 검열하여 중초(中草)가 만들어졌으며, 마지막에는 대신들의 감수 후에 정초(正草)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활자로 인쇄하여 간행, 반포하였다. 실록을 인쇄한 것은 세종때부터이다. 세종은 정초본 1부 외에 활자 인쇄본 3부를 만들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정초본이 완성되면 초초, 중초와 사초를 비롯한 각종 자료들은 폐기되었다. 자료의 유출을 막아야 했고, 최종 편찬된 실록과 상반된 자료가 남아 정쟁을 일으킬 만한 여지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예외적으로 『광해군일기』가 중초본, 정초본이 모두 남은 것은 활자 인쇄가 행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실록은 편찬과정에서의 자료들을 모두 물에 풀어서 기록을 없애고 종이는 재생해서 썼다. 이 과정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주로 세검정(洗劍亭) 인근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이루어졌으며, 세초 후에는 세초연(洗草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록이 사고(史庫)에 보관되면 국왕과 신하들은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간혹 국정 운영에 있어서 관련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때 실록을 참고하는 경우는 있었다.

7 사고, 실록을 보관하는 곳

실록은 국가에서 설치한 사고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3년마다 포쇄(曝曬)를 하여 습기와 곰팡이 등으로부터 실록을 보호하였고, 실록의 이상 유무를 『실록형지안(實錄形止案)』에 작성하였다. 사고의 건축 구조도 2층의 누각 형태로 만들어 지면의 습기로부터 전적(典籍)을 보호하였고, 처마를 길게 뻗게 만들어 눈·비·직사광선 등을 막았으며, 이중 창문을 통해 환기를 시키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였다.

사고에서 실록을 보관하는 체계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크게 변화하였다. 본래 조선 전기 사고는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여 네 곳에 나누어 설치되었다. 세종대부터 실록을 네 본 만들어 춘추관의 실록각(實錄閣)과 충주·전주·성주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네 곳은 모두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로 화재와 외적의 침입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중종대 성주사고의 화재를 빼면 관리상의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춘추관·충주·성주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단, 전주사고본은 전라감사 이광(李洸), 태인의 선비 손홍록(孫弘祿), 안의(安義), 경기전(慶基殿) 참봉 오희길(吳希吉) 등을 비롯하여 여러 백성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손홍록 등은 당시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전적과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던 태조 어진 등을 내장산으로 옮겨 병화를 피할 수 있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고는 춘추관 외에는 모두 산중에 설치되었다.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하여 실록 세 본이 추가로 인출(印出)되었고, 옛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에, 새로 간행된 세 본은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등에 나누어 보관했다. 그리고 초본(草本) 1질은 오대산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 소장본 실록이 불에 타면서 이후 춘추관에서는 실록을 보관하지 않았다. 묘향산 사고본은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전라도 무주 적산상 사고로 옮겼고, 병자호란 때 일부 파손된 강화 마니산사고본도 보수한 후 정족산산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8 실록의 역사적 가치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이유를 포함하여 실록의 가치를 몇 가지만 꼽으면 다음과 같다.

우선 기록이 방대하다. 중국의 『명실록』이나 『청실록』과 비교해 봐도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 국왕에게 보고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풍습이나 일반 백성의 삶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상당하다.

실록은 조선 전기의 역사가 기록된 유일한 연대기이다. 조선 전기에도 『승정원일기』 등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조선 후기의 것만 남아있다. 조선 전기의 역사 기록으로 개인의 문집, 사서 등이 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개인 저술에 담긴 내용도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관이 직서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기록하였던 점은 실록이 객관성과 공정성이 반영된 기록유산임을 알려준다. 더불어 그들이 ‘사신왈(史臣曰)’이라고 하여 별도의 사평(史評)을 남겼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외에도 472년간(1392~1863)의 역사가 일관된 서술 체계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 인쇄 문화를 알 수 있는 기록물이라는 점, 편찬 이후 군주도 열람하지 못함으로써 기록의 신빙성을 확보했다는 점, 사고의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보존상태가 좋다는 점 등의 다양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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