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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族譜]

가문의 계보를 정리하다

미상

족보 대표 이미지

해남윤씨 족보 목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에 관계되는 내용을 적은 책으로, 한 시조에서 나온 후손들을 망라하는 것을 지향한다. 족보에서는 친족 간의 촌수를 밝혀 가문 내의 상하질서를 밝혔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어떤 족보에 기록되었는지는 혈통 혹은 가문 위상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족보는 원래 양반의 전유물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의 변동에 따라 상민이나 천민이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했다.

2 족보는 언제부터 만들어졌나

우리나라에서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가계 의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록이 만들어진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족보의 경우 중국 송의 영향으로 고려 때부터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종부시(宗簿寺)에서는 왕실의 보첩(譜牒)을 담당하였고, 지배층도 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고려의 족보류는 ‘가첩(家牒)’, ‘가보(家譜)’, ‘가승(家乘)’, ‘세보(世譜)’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자신이 소속된 집안 구성원들을 개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가첩의 실물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관련 기록이 묘지명(墓誌銘) 등에 전해지고 있다.

가문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계보를 정리한 족보 형태는 고려 말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존하는 우리나라 족보 중에게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은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이다. 『안동권씨성화보』는 1476년(명 성화 12, 조선 성종 7)에 안동부(安東府)에서 편찬했다. 안동 권씨 가문의 외손 서거정(徐居正)은, 서문에서 권제(權踶)가 간략한 가보를 먼저 작성했다가 그의 아들 권람(權擥)이 대폭 증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족보에는 시조 권행(權幸)으로부터 나온 후손들과 그들과 혼인한 다른 성씨의 인척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계보의 정확성 면에서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성화보』 다음으로 이른 시기의 족보는 1565년(명 가정 44, 조선 명종 20)에 만들어진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이다. 시조 유차달(柳車達)에서부터 19대까지의 내외 후손 4만여 명이 수록되었다.

3 족보는 어떤 내용을 기록하였나

족보는 시조로부터 파생된 다수 후손의 인명과 관련 정보를 수록하였다. 그런데 족보의 편찬 시기에 따라 그 기재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고려·조선시대의 사회 변화를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우선 조선 전기 『성화보』, 『가정보』의 경우 각기 안동 권씨, 문화 유씨의 족보임을 밝히고 있지만, 사위를 비롯하여 외손 계열의 후손을 대를 한정하지 않고 수록했기 때문에 등재된 인물의 성씨가 매우 다양하다. 또한 자녀를 출생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고, 여성의 재가(再嫁, 재혼)와 후부(後夫, 재혼한 남편)를 적고 있으며, 자식이 없는 경우 ‘무후(無後, 후손이 없음)’를 기술하는 등의 특성이 있다. 이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고려한 양측적 친족 사회의 산물로 이해되고 있다. 아울러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그대로 처가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하는 것), 자녀 균분 상속, 자녀 윤회 봉사(輪廻封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냄) 등의 풍습과 관련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족보가 많이 편찬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성화보』, 『가정보』의 수록 인물들이 그 당시 조정의 고위관료들을 망라한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최고 문벌 가문에 국한된 족보 편찬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화보』의 서문에서 서거정은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종법(宗法)도 없었고 보첩(譜牒)도 없었다.”라고 기술함으로써 족보 편찬의 시작 단계에 있었던 『성화보』의 의의를 부각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구(李廷龜) 역시 「이숙평가첩서(李叔平家牒序)」에서 우리나라에는 씨족의 보첩이 전하는 것이 드물어 명성 있는 문벌이 아니면 선대의 계보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경우가 적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족보 간행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각 성관(姓貫)별로 족보가 편찬되었고,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과 지방의 향촌 사족들이 족보에 수록되었다. 16세기 중엽 서원 설립과 함께 배향 인물의 가계를 정리하면서 족보를 간행한 것도 주목된다. 소수서원의 안향(安珦) 가문인 순흥 안씨(順興安氏), 역동서원 우탁(禹倬) 가문의 단양 우씨(丹陽禹氏), 도산서원의 이황(李滉) 가문의 진성 이씨(眞城李氏) 족보 등이 차례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이후 17세기에는 족보가 경쟁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고, 족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보학(譜學)이 발달하기도 했다. 『가정보』를 편찬한 유희준(柳希濬)을 비롯하여 심희세(沈熙世), 조종운(趙從耘), 정시술(丁時述), 임경창(任慶昌), 이세주(李世胄) 등이 널리 알려진 보학의 대가이다.

4 다양한 족보들

족보는 가문의 역사였고, 다양한 형태로 편찬되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 질서가 변동되고 문벌 의식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족보들이 증가하였다. 우선 본인을 중심으로 조상의 세계(世系)를 계보화하고 자녀와 내외손 등을 한 장의 도표로 작성한 족도(族圖)가 있다. 수록 범위에 따라 팔세보(八世譜), 십세보(十世譜), 팔고조도(八高祖圖)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그리고 특정 성씨의 혈통을 밝힌 족보인 씨족보(氏族譜)와 모든 성관(姓貫)의 혈통 관계를 아우르는 종합보 형태의 만성보(萬姓譜)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씨족보의 형태를 띤 족보가 대다수이다. 그런데 본종(本宗)에서 분파된 지파(支派)가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후 그들을 별도의 족보로 만든 지보(支譜) 혹은 파보(派譜)가 간행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파보의 분량이 많아 원래 족보를 능가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 이와 별도로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을 새롭게 수록할 때에는 별록(別錄)이나 추보(追譜)에 기재하기도 했다.

만성보는 17세기 무렵 편찬된 『씨족원류(氏族源流)』,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이 주목된다. 이 중 」이 편찬한 『씨족원류』는 종친인 전주 이씨를 비롯하여 각종 성씨가 족도(族圖) 형식으로 망라되어 있다. 다만 17세기의 족보는 많지 않다. 조선 후기 이규경(李圭景)은 『동국제성보(東國諸姓譜)』, 『성원총록(姓苑叢錄)』, 『씨족보(氏族譜)』, 『만가보(萬家譜)』 등을 비롯한 총 17종의 족보를 언급하였지만, 현재 전해지는 만성보는 대부분 19세기 이후의 것이다.

이외에도 19세기에는 다양한 족보가 편찬되었다. 우선 한 가문의 계보에 국한하지 않고, 공통점이 있는 여러 가문을 하나의 보첩에 묶은 것들이 주목된다. 대표적인 예로 붕당정치에 따라 동일한 정치색을 띤 가문들을 묶은 당파보(黨派譜)가 있는데, 대부분 19세기 중엽에 편찬되었다. 『북보(北譜)』와 『남보(南譜)』는 각기 북인과 남인 가문의 족보이다. 한편, 일부 당파보에서 적대 세력을 수록한 세혐보(世嫌譜)의 사례도 있다. 노론 측에서 경종 때의 신임옥사(辛壬獄事)와 관련하여 소론의 대표 인물과 그 가계를 모아놓은 『수혐록(讎嫌錄)』이 대표적이다.

혈연이 아닌 다른 공통 요소를 가진 부류를 한데 묶은 보첩도 만들어졌다. 문관·무관·음관의 삼반 팔세보(三班八世譜), 의학(醫學)·역학(譯學)·주학(籌學)에 종사한 중인들의 『의역주 팔세보(醫譯籌八世譜)』가 있다. 그리고 『성원록(姓源錄)』의 경우 역관(譯官)·의관(醫官)·산관(算官)·율관(律官)·음양관(陰陽官)·서자관(書字官)·화공(畫工) 등 중인계층의 계보가 수록되었다.

5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동과 족보 위조

족보는 왕실 족보 외에는 사실상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19세기 무렵에 이르러 서얼, 향리, 기술직 중인 등으로서 족보를 가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상민 이하의 계층에서는 족보를 가질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족보는 사문서에 불과했음에도 신분 증명이 가능한 공적 문서로 기능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중인·상민임에도 불구하고 양반 못지않은 경제력과 지식수준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점차 양반 신분을 상징하는 족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족보에 기록되면 양역(良役)을 면할 수 있었고, 양반 행세도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족보를 위조하기도 했다. 공문서가 아니었기에 족보 위조는 더욱 용이했다. 1764년(영조 40)에 한 역관(譯官)은 각종 족보를 수집해 놓고 사적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족보를 위조하다가 발각되었는데, 당시 족보 판매 대상은 주로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위조 행위는 많았던 듯하다. 정조대에는 유명한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을 면제하는 행위를 금지시켜 달라는 간관의 요청도 있었다. 당시 백성들은 무거운 군역 부담을 피하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도 불사했던 것이다.

이처럼 족보를 위조하는 일이 많아지자 양반들은 족보 편찬의 방식을 달리했다. 우선 가문과의 관련성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별보(別譜), 별파(別派)라는 이름으로 별도 수용하였다. 일례로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풍양 조씨의 족보 중에 일부(제28책)가 별보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1826년(순조 26)에 편찬된 족보를 보면 별보 비중이 늘어나 있다. 또한 별보뿐 아니라 전체 풍양 조씨의 비중도 전국 인구 증가율에 비해 급격히 증가하였다. 물론 이 증가율은 풍양 조씨에 국한된 사항은 아니었다. 19세기 들어서 유명 성관들은 신분 상승을 꾀했거나 혹은 실제로 신분 상승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족보에 수록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면서 족보에 수록된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고, 20세기 전반기에 족보 제작 및 위조는 가장 성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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