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지봉유설

지봉유설[芝峯類設]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전서

1634년(인조 12)

지봉유설 대표 이미지

지봉유설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지봉유설』은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睡光)에 의해 편찬되었다.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주제별로 분류된 유서류(類書類)의 저서로 총 20권 10책으로 구성되었다. 천문지리, 관직 및 제도, 문학, 인물을 비롯하여 의식주, 식물, 화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분야별로 분류하여 서술하였다. 1633년(인조 11)에 아들 이성구(李聖求)·이민구(李敏求)가 『지봉집(芝峯集)』과 함께 의령(宜寧)에서 20권 10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2 이수광과 『지봉유설』의 저술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은 1563년(명종 18)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다. 이수광은 16살 때 초시에 급제하고 23세인 1585년(선조 18)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제수되었다. 이후 예문관 대교,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에는 성절사(聖節使) 이산보(李山甫)의 서장관이 되어 명 신종(神宗)의 탄일을 축하하러 북경에 다녀왔다.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북경 사행은 중국의 문물을 직접 보고 들을 뿐 아니라 명의 학자들, 각국의 사신들과도 교유하여 견문과 지식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중국 사행은 서양 학술서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있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저서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604년(선조 37) 함경도 안변부사, 1607년(선조 40) 충청도 홍주목사 등을 지낸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은 임진왜란 후의 지방의 실정과 백성들의 고통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봉유설』은 그의 나이 52세인 1614년(광해군 6) 완성되었다. 이 기간에 이수광은 대사간,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여 물러나 『지봉유설』의 저술에 매진하였다. 이수광은 자신이 공부한 것을 틈틈이 기록하였는데 양이 많아지자 종류별로 글을 나누었다. 이수광이 그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지봉유설』은 처음부터 저술을 목적으로 쓰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당시 전기(傳記)가 없는 것이 많고 문헌에 찾을만한 것이 적기 때문에 자기가 읽은 서적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것이었다. 그가 인용한 서적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 등 육경(六經)에서부터 소설, 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리하여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참고한 문헌은 반드시 그 출처를 적었다.

이러한 『지봉유설』은 이수광의 사후 1633년(인조 11)에 이르러 그의 아들 이성구(李聖求)와 이민구(李敏求)에 의하여 『지봉집(芝峰集)』과 함께 출간되기 시작하여 1634년(인조 12) 20권 10책으로 완간되었다. 『지봉유설』의 서문은 그의 친구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탈고하자, 보기를 청하는 김현성에게 전질을 빌려줬으며, 김현성은 이러한 이수광의 호의에 감사하며 서문을 지었다.

3 고증적 방법에 의한 백과전서식의 체제

책의 제목에서 보이듯이 『지봉유설』은 자신의 호인 ‘지봉(芝峯)’을 붙인 유서(類書)이다. 유서는 항목별로 분류하여 알아보기 쉽도록 엮은 책의 형태이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전반에 걸친 서적에서 고실(故實), 시문(詩文) 등의 사항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다시 그것을 세분하여 세목(細目)으로 열거하였다.

『지봉유설』은 유서의 편성 방법에 따라 총 20권 10책으로 편찬되었다. 먼저 책머리에는 김현성의 서문과 이수광의 자서(自序)가 실려 있다. 내용은 천문부(天文部), 시령부(時令部), 재이부(災異部), 지리부(地理部), 제국부(諸國部), 군도부(君道部), 병정부(兵政部), 관직부(官職部), 유도부(儒道部), 경서부(經書部), 문자부(文字部), 문장부(文章部), 인물부(人物部), 성행부(性行部), 신형부(身形部), 어언부(語言部), 인사부(人事部), 잡사부(雜事部), 기예부(技藝部), 외도부(外道部), 궁실부(宮室部), 복용부(服用部), 식물부(食物部), 훼목부(卉木部), 금충부(禽蟲部) 등 주제별로 크게 25개의 부(部)로 이루어졌다. 25개 부는 다시 182개의 세목으로 분류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권에서는 하늘, 일월성신, 풍운, 눈, 비 등에 관해 서술한 천문부, 세시와 절기, 풍속을 기록한 시령부, 재해, 기황(饑荒), 인이(人異), 물이(物異)를 기록한 재이부가 실려 있다. 천문부에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입각하여 서술하였으며, 재이부에서는 관직 생활 중 직접 경험한 기이한 일들과 풍년과 흉년이 들었을 때 나타나는 물가의 변동사항을 수록하였다.

2권에서는 산수(山水), 해도(海島, 섬), 토지 등의 지리부와 조선, 외국, 북로(北虜), 국도(國都), 군읍(郡邑), 풍속, 도로 등을 저술한 제국부로 구성되었다. 지리부에는 자연 지리적 내용과 명산에 얽힌 일화가 서술되었으며, 외국의 항목에서는 서양 및 남방의 여러 나라 즉 중국 사행 길에 교유한 안남(安南, 베트남), 유구(琉球), 섬라(暹羅, 타이), 일본 등의 사신들에게 전해들은 각 국의 역사, 문화지리, 생활 풍속, 제도와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 관한 관심을 서술하였다. 또한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서양종교인 천주교의 교리, 교황의 지위 및 선정 등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3권에는 제왕, 세대(世代), 정치제도, 법금(法禁), 용인(用人), 상공(賞功) 등이 서술된 군도부와 전쟁, 병기, 병제와 관련된 병정부가 서술되었다. 군도부에서는 조선 정치제도의 각종 폐단을 서술하고 시정책과 함께 부국강병을 위한 화폐 사용을 주장하였다. 병정부에서는 이수광이 직접 겪은 임진왜란에 대해 서술하였다.

4권에서는 관직부가 서술되었는데, 관제, 제배(除拜), 상신(相臣), 장수, 학사(學士), 사관, 사신, 수령, 과목(科目)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5권에서는 학문, 심학(心學), 과욕(寡慾), 초학(初學), 격언 등의 유도부와 경서부가 실려있다. 특히 경서부는 4서 3경을 비롯하여 주례, 제사(諸史), 서적, 저술 등에 대해 5권에서 7권에 걸쳐 서술되었다. 또한 8권에서 14권까지는 문장부로 이루어졌다. 문장부에는 문체, 문평, 고문(古文)을 비롯하여 시(詩), 시법, 시평, 당·송·원·명의 시에 대해 방대하게 저술되었다.

15권에서는 성현, 군자, 소인, 인재, 절의, 열녀, 부인에 관한 인물부와 선악, 청렴, 절검, 사치, 실절 등을 서술한 성행부, 용모, 심신, 외형, 모발 등의 신형부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인물부 절의편에서는 임진왜란시 활약한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송상현(宋象賢), 이순신, 조종도(趙宗道) 등에 대한 일화를 주로 소개하였다. 16권은 언어부로 이루어졌다. 잡설, 속담과 격언, 방언, 해학 등과 관련된 내용이다. 17권은 인사부와 잡사부로 구성되었는데, 혼인, 출산, 질병, 사망, 상장(喪葬), 제사, 성족(姓族), 명호(名號), 이문(異聞)에 관한 내용이다.

18권에서는 서화, 잡기, 음악, 기악, 무격에 관한 내용의 기예부와 선도(仙道), 수양, 선문(禪門)에 관한 외통부로 엮어 있다. 19권에서는 궁실부와 복용부로 구성되었는데, 궁전, 사묘, 학교, 사찰, 성곽, 능묘, 의복, 조장(朝章), 기용(器用), 술, 곡식, 과일 및 채소, 약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자명종의 놀라움과 한번 눈앞에 비추면 말라죽은 나무도 오색의 광채를 내는 파려석(玻瓈石)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20권에서는 화초, 나무, 조수(鳥獸), 곤충에 관한 내용이 담긴 훼목부와 금충부(禽蟲部)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지봉유설은 천문 지리에서부터 인사(人事), 관직, 문장, 인물, 곤충·초목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철저히 분석하였다. 특히 제국부에서는 서양의 문물과 서양사상을 처음으로 소개하여 당대 지식인들의 세계관 확대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수광은 모든 항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관적인 견해는 피하고 자신이 읽은 서적과 견문에 의해 고증하고 기술하였다.

4 『지봉유설』, 조선 사회의 실상을 인식하다

『지봉유설』은 오늘날 대백과사전과 같은 형태의 문헌으로, 내용이 방대하고 광범위하다. 이 책에서 이수광은 조선의 사회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관료제의 모순 즉, 인사정책의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나라에 기강이 없기 때문에 관리들이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며 그 결과 하급서리들까지도 협잡을 자행하여 백성이 피해를 보고 국가재정의 타격을 입힌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료제의 모순을 인사의 핵심인 과거의 폐단에서 찾았고, 과거시험에서 행해졌던 각종 부정행위를 거론하였다.

관료 출신인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백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드러냈다. 사대부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글을 읽고 의리를 말하면서도 위기에 이르면 이를 피하는 철면피라고 비판하였다. 무관도 평소 사욕만 채우다가 전쟁에서는 사졸보다 먼저 도망간다고 비판하였다. 백성의 경우 어리석으나 속일 수 없으며, 비천하지만 이길 수 없는 존재로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가 민심을 얻으면 천자(天子)가 되고, 잃으면 필부(匹夫)가 된다고 하며 백성을 임금의 하늘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수광은 10여 년을 지방관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농촌의 현실을 실제 경험하여 민생이 어떠한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광흥창 및 군자감에 저장되어 있는 세곡의 운용상태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수광은 전란 후의 국가 재정의 고갈 실태를 제시하며 녹봉을 지급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관리들의 탐학과 방납의 폐단이 증가하였음을 언급하였다. 아울러 각종 부역의 남발과 왕실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내수사의 착취도 큰 폐단이라 지적하며 당시 국가재정 정책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이수광은 해결방안으로 대토지소유의 억제, 자작농 확보를 위한 조세수입의 증대, 내수사 폐지, 방납 폐지, 부역 감소들을 주장하였다.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해서는 수차(水車)의 활용을 강조하였다. 중국과 일본에 통용되고 있음에도 조선에서 잘 이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이수광은 나라가 부강해지는 방법으로 수공업의 발전과 화폐 유통을 강조하였다. 그는 조선의 수공업 제품의 우수성을 극찬하며, 이를 더욱 개발, 유통시켜 대외무역을 통해 민생과 부국을 실현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화폐 유통을 위해 금은의 생산 뿐 아니라 국외로의 유출을 방지하자고 하였다.

5 『지봉유설』의 의의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식 문헌이다. 이수광은 수백 권의 저서를 읽고 이를 주제별로 분류하고 철저히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 조선사회를 인식하고 비판하며, 민생 안정과 부국을 위해 향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지봉유설』에서는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가 보이며, 이는 후대 학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특히 『지봉유설』에서는 새로운 문화에 자극을 받은 조선 후기 학자 이수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수광은 유럽의 지도, 기물, 천주교 등의 서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드러냈다. 또한 서양의 기상, 풍속, 군함, 대포, 화기와 같은 문물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지리, 풍속, 문물 등도 소개하여 당대 지식인들의 세계관 확대에 큰 기여를 하였다. 더욱이 『천추실의』를 처음으로 소개하여 19세기에 서학이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양 문물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지봉유설』은 훗날 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