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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조선 산수화의 새 지평을 열다

미상

진경산수화 대표 이미지

정선 필 금강전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새로운 화풍으로, 우리나라의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산수화이다. 우리 산천의 실경(實景)을 그리는 경향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18세기 정선(鄭敾, 1676~1759)은 기존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진경산수화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는 실경의 단순한 재현에 그치지 않았다. 왜곡, 변형, 확대, 축소 등의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자연이 주는 본질적인 느낌과 감흥을 담고자 했다.

2 조선시대 산수화의 변천

진경산수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시대 산수화의 변천 과정부터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진경산수화는 중국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상황에서 우리 자연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중국 화풍이 조선에 영향을 끼쳤고, 그것이 진경산수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회화 전통을 이어받은 가운데 북송대의 곽희파(郭熙派, 또는 이곽파(李郭派))와 남송대의 마하파(馬夏派)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가 그려졌다. 대표적인 산수화로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가 있다. 안견의 그림은 도원으로 가는 기암절벽의 산세와 종착지인 도원의 풍광이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현재 안견의 작품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한데, 안견은 조선 초기 화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이른바 ‘안견파’ 화가들을 배출하였다.

조선 중기, 즉 16∼17세기 무렵에는 절파(浙派) 화풍이 유행하였다. 절파 화풍은 명 초기 절강성 출신 화가 대진(戴進)을 필두로 하며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망라한다. 조선에서는 김시(金禔), 이경윤(李慶胤), 김명국(金明國) 등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물론 화원들이 하나의 화풍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작품도 많았고, 남종화풍으로 그려진 그림도 있었다. 한 화폭에 여러 화풍을 각각 구사하거나 절묘하게 섞어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18세기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가 많이 그려졌다. 남종화풍은 원 말기에 활약한 한족(漢族) 출신 문인화가들이 발전시킨 화풍이다. 북송대의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부자가 창시한 이래 명청대까지 계승되었던 미법(米法) 산수화풍, 원 말기 황공망(黃公望)의 피마준법(披麻皴法) 등을 많이 활용하였다. 미법은 점을 여러 번 겹쳐 찍어서 형태를 표현하는 미점준(米點皴)을 써서 부드러운 곡선의 흙산이나 멀리 보이는 나무, 비온 뒤의 경관이나 짙은 안개가 낀 습한 산세를 그릴 때에 많이 활용된 화법이다. 피마준법은 먹의 물기가 거의 없는 붓을 문지르듯 그림으로써 베(麻) 섬유를 푼 것 같은 꺼칠꺼칠한 감촉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피마준법으로 산의 표면을 그리면, 매우 입체적인 느낌을 나타낼 수가 있다. 이러한 남종화풍의 기법에 조선의 실경산수화 전통이 혼합된 것이 진경산수화이다.

진경산수화의 명맥은 19세기 중반 이후 점차 약해졌다.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민화(民畵)에 일부 전해지기는 했지만, 주류 화가들에게는 외면당했다. 대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화풍이 조희룡(趙熙龍), 허련(許鍊) 등에게 전해지면서 화단은 고도의 문기(文氣)와 사의(寫意, 화가의 정신을 그림에 표현하는 방법)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3 우리나라의 경치를 산수화로 그리다

진경산수화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나라의 실제 경치를 보고 그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실경산수화’의 개념과 거의 비슷하게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넓게 보면 실경산수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실경과 진경은 그 의미가 다르다.

실경은 우리나라 자연을 실제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실경산수화는 고려나 조선 초기에도 확인된다. 고려 인종 때 송 사신 행렬에 참여한 이녕(李寧)은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휘종(徽宗)에게 바쳤고, 충렬왕 때에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원에 가지고 가기도 했다. 단종 때에는 조선에 온 명 사신이 금강산 그림을 구해 가기도 했다. 한편,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를 비롯한 여러 계회도를 보면, 모임이 이루어진 우리나라 산하가 묘사되어 있다. 명종은 관료를 지방을 보낼 때에 화사(畵史)를 대동하고 가서 명승지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궁궐에 앉아 그림만 봐도 직접 가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진경산수화 역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포착하였다. 정선도 자신의 생활 터전이었던 한양의 인왕산·백악·목면산(남산)·장동(壯洞), 지방관으로 근무했을 때의 영남지역과 양천(陽川) 부근의 한강, 그리고 금강산 등의 절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렇다면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어떻게 표현한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진경(眞景)’이 실제 경치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진경’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우선 진경산수화는 대상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종 기법을 활용하여 산천이 주는 느낌을 극대화하였다. ‘진경산수’라는 용어에 담긴 것처럼 화폭에 산수의 본질을 표현했을 때 비로소 진경산수화가 될 수 있다. 화풍으로는 기존의 실경산수화에 남종화법을 가미해서 그린 그림이라는 의견이 보편적이다.

4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晳)은 정선의 『구학첩(丘壑帖)』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새로운 화격을 스스로 창출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누습을 씻어버리니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원백(元伯, 정선의 자)에게서 비로소 개벽하였다.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조영석은 정선의 산수화에 대해 극찬하였다. 후대의 사람들도 정선이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지의 산수화풍을 개척하였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물론 조영석이 정선의 산수화에 ‘진경산수’라는 용어를 붙인 것인 아니고,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 정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진경산수화가 정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일반적으로 진경산수화는 주로 높은 곳에서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의 시각으로 동적인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다. 정선의 대표작인 「금강전도(金剛全圖)」(1734년 제작, 국보 제217호,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역시 금강산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표현했다. 이러한 화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정선의 그림 이후에 부감법을 사용하여 산봉우리들은 한 화폭에 집결시켜 그리는 방법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왼편 하단의 토산들은 피마준법과 미점법(米點法)을 써서 표현하고, 그 외의 암산들은 수직준법(垂直皴法, 예리한 필선을 수직으로 그어 내리는 화법)으로 우뚝우뚝한 산세를 그렸다. 산의 가장자리에는 푸른색을 칠해 금강산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였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실제 산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산수가 품고 있는 느낌과 감동을 적극적으로 화폭에 반영하기 위해 변형과 왜곡, 축소와 확대를 서슴지 않았다.

정선은 금강산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18세기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원이었고, 대중의 열망에 힘입어 정선은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등의 금강산 그림을 많이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710년(숙종 36) 이병연이 금화현감으로 부임했던 기간에는 정선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기이한 곳을 그리도록 했다. 그는 붓 두 자루로 휘두르듯 그리는 휘쇄필법(揮灑筆法)을 사용하여 빠른 속도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년 제작, 국보 제216호, 리움 소장)는 비 온 뒤에 안개가 낀 인왕산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위쪽의 인왕산은 비에 젖은 암벽의 중량감을 널찍한 붓으로 여러 번 칠하여 단단하게 표현하였다. 기존 산수화와 달리 멀리 보이는 인왕산을 앞의 경치보다 오히려 짙게 덧칠함으로써 산의 풍경을 극대화하였다.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와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아직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선은 자신의 집이 있던 인왕산을 비롯하여 한양의 풍경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유거(仁谷幽居)」, 「독서여가(讀書餘暇)」가 있고, 「경복궁(景福宮)」, 「백악산(白岳山)」, 「대은암(大隱巖)」, 「청송당(聽松堂)」, 「자하동(紫霞洞)」,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필운대(弼雲臺)」, 「동소문(東小門)」, 「세검정(洗劍亭)」 등 많은 한양 그림이 있다. 특히,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33장의 그림이 있는데, 이 중 20여 점은 한강의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들은 예술적인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서울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지리학적 가치가 높다.

5 정선 이후의 진경산수화

정선의 진경산수화 화풍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 손자인 정황(鄭榥)을 비롯하여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김응환(金應煥), 김석신(金碩臣), 최북(崔北) 등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강희언의 「인왕산도(仁王山圖)」는 늦은 봄에 도화동(桃花洞)에 올라 인왕산을 보고 그린 그림인데, 골짜기가 쭉쭉 뻗어내린 형상을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 김윤겸의 『영남명승첩(嶺南名勝帖)』은 영남의 유명한 풍경들을 그려 화첩으로 만든 것으로, 역시 진경산수화로 볼 수 있다. 다만 엶은 채색으로 된 수채화 같은 느낌이 강하여 정선의 그림과는 조금 다르다. 그리고 김석신의 「도봉도(道峯圖)」에도 정선의 화풍이 많이 가미되었다. 우뚝한 바위산이나 나뭇가지를 표현한 방법이 진경산수화로 볼 수 있다.

6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받은 회화식 지도

진경산수화는 회화식 지도의 제작을 활성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강희언의 「인왕산도」에 실린 강세황(姜世晃)의 찬문을 보면, “진경을 그리는 사람은 매양 지도가 비슷하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된다.”라고 써져 있다. 진경산수를 그리던 화가들이 자신의 예술 작품이 회화식 지도로 오해받을까 고민했던 흔적이다.

이런 고민이 있을 정도로 진경산수화는 회화식 지도와 공유하는 바가 많다. 회화식 지도를 보면 실경을 지면에 옮기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18세기 중반∼19세기 중반의 회화식 도성도에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 영향이 크게 나타났다. 지도에 나타난 산세 부분만 떼어 보면,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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