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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

세 명의 왕후를 위한 성종의 효심

1483년(성종 14)

창경궁 대표 이미지

창경궁 명정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창경궁(昌慶宮)의 옛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다. 수강궁은 1418년 즉위한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건설한 신궁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은 대왕대비인 정희왕후, 생모인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수리, 확장하였다. 그러면서 궁의 이름도 창경궁으로 하였다. 이러한 창경궁은 위로는 창덕궁과 아래로는 종묘와 연결되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로 불리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시 모두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완공되었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어 인조대 다시 복구되었다.

이러한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궁내 전각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이용되었고, 궁의 명칭도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 1983년에 이르러서야 창경궁 내 일제시대 변형된 시설들을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창경궁의 제 모습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2 성종, 세 명의 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건설하다

창경궁은 수강궁의 옛 터에 건립되었다. 수강궁은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뒤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던 궁이다. 1418년 11월 3일 완공되었으며, 4일 뒤 상왕인 태종이 상왕전에서 거처를 수강궁으로 옮겼다. 이후 1482년(성종 13) 5월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와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 소혜왕후)가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2월 성종은 수강궁에 거처하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의 수리를 명하였다.

수강궁을 수리, 확장하는 공사는 1483년(성종 14)부터 시작되었다. 3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인 김종직(金宗直)이 창경궁의 상량문(上樑文)을 지어 올린 것으로 보아 ‘창경궁’이란 궁호도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던 중 온양으로 온천을 간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다. 공사는 8월에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동원하여 다시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2월 주요 전각이 완공되어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徐居正)이 각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이때 전(殿)은 명정전(明政殿)·문정전(文政殿)·수녕전(壽寧殿)·환경전(觀慶殿)·경춘전(景春殿)·인양전(仁陽殿)·통명전(通明殿)이 건설되었고, 당(堂)은 양화당(養和堂)·여휘당(麗暉堂), 각(閣)은 사성각(思誠閣)이 건설되었다.

곧이어 3월 20일에는 우부승지 김종직(金宗直)이 ‘새로 영건(營建)한 창경궁기(昌慶宮記)’를 지어 올렸으며, 4월에는 담장 공사를 진행하였다. 7월에 성종은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북쪽에 정자 하나를 마련하여 환취정(環翠亭)이라고 직접 이름을 짓고, 김종직을 시켜 기문(記文)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9월에 이르러 창경궁 영건 공사는 일단락되어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3 창경궁, 임진왜란으로 불타다

이궁으로서의 역할을 한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4월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소실되었다. 임진왜란(1592)으로 도성 안의 모든 궁궐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던 것이다. 선조의 파천(播遷) 소식이 들리자 일부 화가 난 한양 도성민들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재물을 훔쳤으며, 노비 문적을 관리한 장례원과 형조에 방화하였다. 그런 후 광화문으로 달려가 궁성의 창고를 노략질하고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이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재물이 많기로 소문난 임해군(臨海君)과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집도 도성민에 의해 약탈당한 후 불태워졌다.

선조는 전란 후 궁궐을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 건설은 논의 단계에 머물렀을 뿐 추진되지 못한 채 창덕궁 중건으로 이어졌다. 창덕궁의 경우 1607년(선조 40) 중건에 필요한 재목 조달을 시작으로 2년 뒤인 1609년(광해군 1) 10월 인정전(仁政殿), 환경전(歡慶殿), 성정전(宣政殿) 등 각 전각이 조성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창덕궁 내 남은 전각에 대한 마무리 공사가 이루어졌다. 창경궁은 창덕궁 공역이 끝날 무렵인 1609년에 논의되기 시작해, 궁궐 공사는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덕궁은 인조반정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창경궁은 이괄의 난으로 명정전, 춘휘전 등 일부 전각을 제외하고 거의 불에 타버렸다. 따라서 인조는 1633년(인조 11)에 창경궁의 수리를 완성하여 거처를 옮겼으며, 이후 1639년(인조 17)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다시 도성을 떠날 때까지 창경궁을 주된 시어소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와 보수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830년(순조 30) 다시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화재가 나서 함인정(涵仁亭)·공묵합(恭默閤)·경춘전(景春殿)·숭문당(崇文堂)·영춘헌(迎春軒)·오행각(五行閣)·빈양문(賓陽門) 등 많은 전각이 연소되었다. 이러한 창경궁의 복구는 1833년(순조 33)에 시작되어 이듬해 4월 마무리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창경궁 내전의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에 건설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다

성종대 창건한 창경궁은 조선시대 내내 궁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창경궁이 급변하게 된 것은 1907년 순종실록이 즉위한 이후부터이다. 순종실록은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한 후 태황제인 고종을 남겨두고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에 일제는 순종실록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들을 부수고 그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개원식(開苑式)을 행하였다. 그런 후 일반 사람들의 관람을 허용하였다.

1911년(순종 4)에는 궁궐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창경궁이 갖고 있는 궁궐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또한 창경원 높은 언덕 위에 박물관을 건립했으며, 식물원 본관에도 일본식 가옥 1동(棟)을 신축하여 낙성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창경궁 내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 등을 세우고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용하여 1983년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1983년 10월부터 창경원에 있던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12월에는 창경원으로 격하된 이름을 창경궁으로 회복시킨 후 1986년까지 일제의 잔재시설들을 철거하는 한편, 명정전 회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을 복원하였다.

현재 창경궁은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정문 영역으로 홍화문(弘化門)과 옥천교(玉川橋)가 있고, 외전 영역으로 명정문(明政門)을 지나 정전인 명정전, 왕의 집무처인 문정전(文政殿), 태학생들을 만나 주연을 베풀던 숭문당(崇文堂)이 있다. 내전 영역으로는 함인정을 비롯해 침전인 환경전·경춘전과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 양화당·영춘헌·집복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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