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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거대한 석판에 천문을 새기다

1395년(태조 4)

천상열차분야지도 대표 이미지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태조 4)에 석판에 새긴 천문도이다. 우선 그 명칭을 보면, ‘천상(天象)’은 천문 현상으로 해·달·별의 변화를 나타낸다. ‘열차(列次)’는 동양의 별자리인 12차(次)를 벌여 놓았다는 뜻인데, 12차는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 부근의 12구역을 이른다. 분야(分野)는 하늘의 별자리를 지상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킨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의 모습을 새긴 그림으로, 하늘 별자리와 땅의 지리를 결부시킨 내용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석각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1395년(태조 4)에 석각된 것이고(국보 제228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또 하나는 1687년(숙종 13)에 다시 새겨진 것이다(보물 837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돌에 새겨졌기 때문에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2 태조 때의 석각본, 이전 시대의 천문을 옮겨 새기다

태조 때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 배경은 석각본 하단에 새겨진 권근(權近)의 발문에 서술되어 있다. 앞부분 일부를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이 천문도의 석본(石本)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으나 병란으로 강에 빠져 분실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 인본(印本)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조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본 하나를 받치는 자가 있어 이를 귀하게 여겨 서운관으로 하여금 이를 돌에 다시 새기도록 명하였다.

위 내용은 평양성에 있던 천문도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모본이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연구자들은 천문도 안의 도설(圖說), 별자리 그림인 성도(星圖) 등을 통해 모본의 제작 시기, 성도의 관측 시기 등에 대해 분석해 왔다. ‘평양성’이라는 지명에 주목하여 모본 제작 시기를 고구려 말기로 보는 데에는 상당수가 동의하는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는 권근의 서술에 ‘옛 평양성’이라고 쓰여 있을 뿐 ‘고구려’가 등장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연구가 있다. 또한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의 천문도를 모본으로 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별자리 관측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50년부터 기원후 1세기, 기원후 200년, 기원후 4∼6세기 등 각각의 주장이 다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결과만으로 관측연대를 추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조선 건국 직후 평양성의 모본을 토대로 그 오차를 고쳐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되었다. 너비 122.7cm, 높이 211cm, 두께 11.8cm의 직육면체 석판은 크게 위, 아래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상단(전체의 2/3)에는 별자리 그림이 짧은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다. 별자리 그림은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그렸다. 또한,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거의 표시되었다.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7개의 별을 점으로 새겼다. 밝은 별은 크게, 희미한 별은 작게 새겼다는 점도 주목된다.

하단(전체의 1/3)의 맨 위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천문도의 작성 배경과 과정, 제작자의 성명과 제작 시기 등이 적혀 있다.

다만 이 석각본은 훼손 정도가 심한 편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마모되거나 금이 간 부분이 많다. 게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보전되지 못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1960년대 말 창경궁의 명경전 뜰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유원지 창경원’에 놀러왔던 사람들이 밟고 다니던 널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3 세종 때에도 석각본을 제작했었나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주목할 점은 석판의 앞면뿐 아니라 뒷면에도 천문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새겨진 내용은 거의 같지만, 제목이 상단 위에 쓰여 있다는 것이 앞면과 다르다. 이 앞뒤의 관계는 세종 때의 기록과 결부되면서 다른 분석이 이루어졌다.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가 지은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발문(跋文)을 보면, 천문도 석각본[石本]을 만들었다는 서술이 보인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서는 제작 연대인 1433년(세종 15)을 밝혀놓기도 했다. 여러 기록을 토대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양면 중 한 면을 세종 때 새겨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인지, 앞면과 뒷면 중 어느 것이 세종 때 제작된 것인지 등에 대한 분석이 행해졌지만, 이 역시 논의가 제각각이다.

분명한 것은 세종 때에도 석각본 천문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다만 기록은 매우 짧다. 그러나 당시 해, 달, 오행성을 비롯한 천체를 모두 측정하였고, 고금의 천문도들을 조사하여 같고 다른 점을 파악한 후 관측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한 별자리의 위치를 새로 측정해서 수정·반영했다는 점을 서술해 두었다. 이와 같은 원칙하에 제작된 석각본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양면 중 어떤 면일까? 아직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당시 천문 역법 관련 사업은 매우 활발하게 행해졌다. 세종은 천문 관측에 필요한 간의(簡儀),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圭表) 등의 기기, 시간 측정에 필요한 해시계·물시계들을 제작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토대로 하여 석각본 천문도도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4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여러 버전

전근대 천문 연구는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점 사업이었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새 국왕 태조에게 ‘관상수시(觀象授時, 천문을 관찰하여 절기를 정함)’의 권한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의 정당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천문도는 그 자체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는 천문도를 적극적으로 제작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였고, 절기의 계산, 천재지변의 예측 등의 실용적인 목적도 이뤄낼 수 있었다. 또한 역법 체계도 정교해졌다.

천문도 제작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세종 때 천문도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앞에서 확인했지만, 1687년(숙종 13)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복각본이 제작되어 현재 실물로 남아있다. 내용은 태조 때의 것과 같다. 이 복각본에도 상단에 1,467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권근의 글 역시 그대로 수록되었다. 다만 별의 크기, 글자 크기를 조금 다르게 만드는 등의 차이는 있다. 또한 너비는 14.2cm, 높이는 3cm 정도 작지만, 두께는 18.4cm 증가한 30.3cm여서 훨씬 안정적으로 석재 무게를 지탱한다. 태조 때의 석각본보다 훨씬 후대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천문도의 보전·보급에는 필사, 목판 인쇄, 탁본 등의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우선 석각본을 종이에 옮겨 그린 필사본이 여럿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8호에 지정된 천문도는 음양과(陰陽科) 출신의 집안에서 교육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는데, 종이에 그려진 만큼 세부 내용을 파악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목판 인쇄본은 영조 대 숙종의 천문도를 모사한 목판을 만들어 인쇄한 것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숙종 때 복각본의 초기 탁본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도 탁인본(拓印本)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서양의 천문학이 도입된 후인 18세기에는 기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서양식 천문도가 8폭 병풍에 나란히 그려진 사례도 있다. 신·구법천문도(新舊法天文圖)는 처음 3폭에는 「천상열차분야도」를, 다음의 4폭에 남극과 북극 둘레의 황도북성도2폭, 황도남성도 2폭을 그려 「신법천문도」를 묘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1폭에는 「일월오성도」를 그렸다.

현재 천문도의 실물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국왕 즉위나 세자 책봉 시에 다양한 형태로 보급이 되었던 만큼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천문도를 소장한 경우도 여럿 있었다. 박승임(朴承任)은 서재의 천장에 천문도를 붙여놓고 천문학을 익혔으며, 밤에는 밖에 나가 실제 별자리와 대조해 보기도 했다. 기준(奇遵), 황윤석(黃胤錫) 등은 천문도를 보고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다음은 기준의 시 내용이다.

28수의 별자리는 천경(天經, 하늘을 씨줄로 표현)을 둘러싸고 / 二十八宿包天經
일월과 오행성은 번갈아 운행하네 / 日月五緯相錯行
북극과 남극이 근본[樞紐]을 꿰뚫고 / 北極南極貫樞紐
한번 움직여 무궁한 조화[萬化]를 이루네 / 一機運運萬化成

5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역사적 가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와 더불어 동양 천문도를 대표한다. 동아시아에서 하늘 전체의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제작된 시기는 3세기 무렵 이후인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도가 1247년(남송 순우 7)에 제작된 「순우천문도」이고, 그다음으로 오래된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오랜 전통을 지닌 천문 관측 기술을 기반으로 별의 위치와 밝기 표시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천문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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