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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漢陽都城]

서울을 수호하는 거대한 울타리

1396년(태조 5)

한양도성 대표 이미지

서울 한양도성(장충동지구)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한양도성은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여 궁궐과 종묘를 건설한 후, 1396년(태조 5) 수도의 방위(防衛)를 위해 쌓은 것이다. 태조 대에는 석성과 토성으로 도성을 축조했으나 세종 대 모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장인에 의해 성곽이 수축되면서 성돌이 규격화되었다. 숙종대에는 약 45㎝의 정방형 석재를 사용했으며, 순조대에는 약 60㎝의 정방형 대형 석재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한양도성의 길이는 약 18km에 이르며,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의 4대문과 홍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 4소문을 두었다. 이러한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계획을 이유로 성문과 성벽이 훼손되었으며, 6·25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양도성은 복원되기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태조, 수도를 방어할 도성을 축조하다

도성은 수도를 지키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궁궐, 종묘, 사직, 문묘 등을 건설한 다음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도성을 건설하였다.

1395년(태조 4) 윤9월 태조는 도성 축조를 위한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였고, 정도전에게 도성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도성의 건설이 적으로부터 수도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한양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했다. 따라서 정도전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인 북쪽의 백악산을 비롯하여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동쪽의 낙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고, 태조가 직접 성터를 둘러보았다.

본격적인 도성의 축성공사는 1396년(태조 5)에 두 차례로 걸쳐 이루어졌다. 1차 공사는 1396년(태조 5) 정월에 시작하여 49일 만인 2월 28일에 마무리되었다. 1차 공사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서북면의 안주 이남, 동북면의 함주 이남 등지의 군현민 118,070명이 동원되었다. 도감은 도성 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다. 1구간을 600척으로 하고, 총 97구간으로 나누어서 도별로 분담하여 성을 쌓도록 하였다. 자호는 백악(白岳)을 기준으로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조자(弔字)로 그치게 하였다. 한양도성은 지형이 높고 험한 곳은 석성을 쌓았으며, 평지와 평산에는 토성을 쌓았다.

그러나 축성 시기가 한겨울인 1월이었고, 기간이 49일로 짧았기 때문에 1차에 총 18km에 달하는 도성을 완전하게 쌓는 것은 무리였다. 더욱이 동대문(東大門)의 경우 지세가 낮아 밑에 돌을 포개어 올린 후 성을 쌓았다. 따라서 다른 지역보다 공사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사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성문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2차 공사는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이루어졌다. 여름에 내린 폭우로 도성 곳곳이 붕괴되자 태조는 전라, 경상, 강원도의 인부 79,000명을 동원하여 49일간 2차 공사를 실시하였다. 2차 공사에서는 무너진 토성을 석성으로 교체하였으며, 석성 가운데 낮은 곳은 추가로 높게 쌓았다. 그리하여 2차 공사의 경우 1차에 미흡했던 구간을 수축하여 도성을 완성하였으며, 각 문루의 건설도 마무리하였다.

3 도성문의 이름을 정하다

태조는 도성 안팎을 드나들 수 있도록 대문과 소문 각각 4개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4대문과 4소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난 1396년(태조 5) 9월에 완공했다. 4대문으로는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청문(肅淸門)을 건설하였으며, 각 대문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사람이 지킬 다섯 가지 도리 오상(五常),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 근거를 두고 명명하였다. 다만 북문의 경우 예외적으로 숙청문이라고 하였다. 숙청문은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태종에게 장의동(藏義洞) 문과 관광방(觀光坊) 동쪽 고갯길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이곳에 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4소문으로는 북동쪽에 혜화문(惠化門)을 두었다. 혜화문은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 그런데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여 1511년(중종 6)에 두 문 이름이 같아서 부르기에 혼란하므로 혜화문이라 고쳤다. 보통 동소문(東小門)이라 한다. 남서쪽에는 소의문(昭義門)을 두었다. 소의문의 처음 이름은 소덕(昭德)이며, 민간에서 서소문(西小門)이라 부른다. 한편, 서북쪽 문을 창의문이라 하고, 동남쪽 문을 광희문光熙門)이라 하는데 광희문은 민간에서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렀다. 또 수문(水門) 2개를 설치했는데, 흥인문 남쪽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을, 광희문 북쪽으로 이간수문을 두었다.

이러한 도성문은 밤 10시 무렵 인정(人定)에 모든 문을 닫고 새벽 4시경인 파루(罷漏)에 일제히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 시간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어 관직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돌아다닐 수 없었다.

4 도성의 수축과 힘겨운 축성공사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한 이후,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개성으로 환도하자 도성은 방어 기능을 잃은 채 방치되었다. 도성의 수축 논의는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이후인 1413년(태종 13) 제기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세종 때에 이르러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세종은 1421년(세종 3)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에서 322,460명의 역군을 동원하여 무너진 28,487척을 수축하였다. 도성 공사는 허물어진 곳을 보수하고 기존의 토성은 석성으로 쌓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였다. 청계천 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동대문 방면에 2간의 수구도 증축하였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었으므로 부상자도 속출하고 도망자도 발생하였다. 정부는 공사 인부들을 치료하기 위해 4곳의 구료소를 설치하는 한편, 성을 쌓다 도망가는 자는 초범자는 곤장 1백 대를 치고, 재범자는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후 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을 겪은 뒤 숙종 때 다시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태조대, 세종대에 전국의 군현민을 동원하여 공사했던 것과 달리 숙종대에는 도성의 삼군문(三軍門)이 공사를 담당하였다. 이때의 공사는 기존의 성돌이 작아서 잘 무너졌기 때문에 1.5척(45㎝) 정도의 정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벽돌처럼 치밀하게 쌓는 작업을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면 도성의 성곽보수 기술은 한 단계 발전되어 2척(약 60㎝) 정도의 대형 석재를 정교한 가공 기술을 사용하여 쌓았다.

이러한 도성의 관리는 18세기 후반 수도 중심의 방어체계가 정립되면서 성의 동서남북의 지세를 고려하여 삼군문에서 분담하였다. 훈련도감은 숙정문 무사석(舞砂石, 성문의 홍예 옆에 층층이 쌓는 돌)에서 돈의문까지를 담당하였으며, 금위영은 돈의문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쪽까지, 어영청은 광희문 남쪽에서 숙정문 동쪽까지 담당하였다. 그리고 매해 봄·가을에 병조 판서와 낭청이 공조·한성부의 당상과 낭청과 함께 두루 다니면서 성첩을 조사하여 무너진 곳을 고쳐 쌓았으며, 번갈아 맡은 영문에서 장교를 정하여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파수하였다.

5 서울의 관광지가 된 도성, 순성놀이를 하다

도성은 봄과 여름철에 서울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돌면서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도성을 한 바퀴 돌면 하루가 걸리는데, 이를 순성(巡城)놀이라고 하였다.

순성은 처음에는 성벽을 점검하며 순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일종의 신앙적 역할뿐만 아니라 성벽 주변을 따라 경치를 즐기는 유람의 형태로 유행했다. 일상생활 속의 순성은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한 선비들이 도성을 돌며 급제를 빌었으며, 종로의 상인들이 운수를 비느라 남몰래 성벽을 한 번씩 도는 등 일종의 신앙으로 여겨졌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 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기술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봄과 여름철에는 성안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 한 바퀴 돌자면 하루해가 걸린다. 이것을 순성놀이(‘巡城之遊’)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조선 후기 서울 사람들에게 있어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은 풍습이자 놀이문화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순성놀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 “순성장거(巡城壯擧)”라 하여 신문사가 본격적으로 주관하면서 안내 광고를 낼 정도로 서울의 문화형태로 자리 잡았다.

6 근대화 과정으로 훼손된 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내내 서울의 방위시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도시의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각 문루와 연결된 도성이 철거되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1899년 서울 시내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동대문과 남대문, 서대문 주변 성곽의 일부분이 헐려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1907년에는 일본 태자의 방한을 앞두고 길을 확장하기 위해 남대문 좌우의 성벽을 철거하였다. 이후 성벽은 물론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광희문 등 성문도 파괴되었다. 다만 남대문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나갔던 문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어 철거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허물어진 성벽의 성돌은 인천항 부두를 새로 고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한양도성은 1968년 1·21사태를 계기로 군사 목적에 따라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1975년 대통령의 관방유적 중점 복원 지시에 따라 ‘서울성곽복원사업추진본부’ 및 ‘서울성곽복원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를 시작으로 복원 사업을 진행하였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관리·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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