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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한치윤,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하다

1823년(순조 23)

해동역사 대표 이미지

해동역사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해동역사』는 한치윤(韓致奫)과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약 20년에 걸쳐 완성한 우리나라의 통사(通史)이다. 체재는 세기(世紀), 지(志), 고(考)로 구성되었다. 총 80권 중에서 70권은 한치윤이 지었고, 한치윤 사망 이후에 한진서가 지리고(地理考)에 해당하는 15권을 보완하여 완성하였다. 시대는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 다루었다. 기전체(紀傳體)와 강목체(綱目體)를 일부 채용하기는 했지만, 명확하게 어떤 체재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2 한치윤의 생애와 학문

한치윤은 1765년(영조 41) 서울에서 출생한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蕤堂)이다. 25세가 되던 해인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당시 형 한치규(韓致奎)가 4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 한진서(韓鎭書)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가세가 기울어진 데다가 남인 계열의 신분으로는 과거 합격을 보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신 그는 젊은 시절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리며, 북학파(北學派)에 속하는 유득공(柳得恭), 김정희(金正喜), 홍명주(洪命周) 등과 가깝게 지냈다.

1799년(정조 24)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 사행에 참여한 족형(族兄) 한치응(韓致應)을 수행하여 청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청의 선진문물을 살펴볼 수 있었고, 이 경험은 그의 학문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귀국 이후 청에서의 견문을 담은 『연행일기』를 지었는데,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현재 전하는 저작은 『해동역사』 뿐이다.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청의 고증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해동역사』라는 서명도 청 마숙(馬驌)이 지은 『역사(繹史)』에서 근거한다. 마숙은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역사 연구에 매진한 인물이다. 마숙의 저서에 비견될 만한 우리나라[海東]의 『역사』를 짓고 싶다는 한치윤의 바람이 서명에 드러난다.

『해동역사』의 집필은 순조 즉위 후 어느 시점부터 10여 년 동안 ‘머리는 엉클어지고 땀은 비 오듯 흘리면서 밥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매진했다. 한치윤은 여러 문헌에서 보이는 자료를 모아 베끼고 손칼과 풀을 가지고 자료를 합쳤다가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글을 작성해 나갔다. 그러나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로 1814년(순조 14)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카 한진서는 숙부가 마무리짓지 못한 「지리고(地理考)」를 약 10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한진서는 숙부의 초고를 편집하고 추가로 자료를 모아 보완하였다. 그가 서문을 쓴 1823년(순조 23) 2월 1일에 책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치응이 쓴 한치윤의 묘지(墓誌)에서는, 그가 세속의 얄팍한 영화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책 모으는 것을 좋아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서적 수천 종을 보유했다는 서술이 있다.

3 한치윤과 한진서의 『해동역사』 집필

『해동역사』는 기존 자료를 토대로 작성하되, 자료에 대한 지은 이의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한치윤은 중국, 일본 서적에서 우리나라의 사실(史實)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채록하고, 이를 종류별로 나누어 조목을 만들어 서술했다.

그가 인용한 서적의 수는 약 550종에 달한다. 참고문헌이 책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의 사서는 상서(尙書), 모시(毛詩) 등 약 520종이고 일본 사서는 22종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인용했지만 서목에 빠져 있는 문헌도 몇 편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서적을 열람하여 책을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간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동역사』의 원문은 모두 외국의 사료를 취해 엮은 한국의 통사이고, 여기에 편찬자의 의견과 교감(校勘)이 붙는 형식이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원칙으로 했지만, 자료의 배열에 저자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또한 기사에 오류가 있으면 ‘안서(按書)’를 병기해서 수정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서술해두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한치윤의 역사의식도 드러난다.

4 『해동역사』의 구성과 내용

『해동역사』의 서문은 한치윤의 친구 유득공이 지었다. 유득공은 기존에 우리나라 역사서로 참고할 만한 것은 『고려사(高麗史)』 뿐이며, 고려 이전의 역사를 살펴볼 만한 사서가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소략하여 볼 만한 것이 없다.’라는 세간의 평가를 전하고 있다.

권1∼16은 세기(世紀)로, 역대 왕조를 연대 순으로 서술하였다. 우선 동이총기(東夷總記)에서 우리가 동이문화권에 속하며, 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고기(古記)』의 기록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며 건국사실을 매우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상대적으로 중국 사서에 기자조선 기사가 많아 『해동역사』의 관련 서술도 매우 상세하다. 이어 위만조선, 삼한, 예맥, 부여, 옥저, 사군(四郡)에 대한 서술이 있다.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기록되었는데, 『삼국사기』의 신라 위주 서술에서 탈피한 것은 『해동역사』에서 주목할 점이다. 뒤의 인물고(人物考)에서도 고구려 22인, 백제 30인, 신라 20인을 수록하였다.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를 따로 설정하지 않고, 발해를 독립된 세기로 구분한 것도 특징이다.

고려시대 서술은 『고려사』에서 누락된 사실을 많이 보충했다. 또한 『고려도경(高麗圖經)』 등에서 『고려사』와 다른 사실이 있으면, 『고려사』를 근거로 하여 수정하기도 했다.

별도로 여러 작은 나라들을 분류해두었는데, 여기서는 가야[加羅], 임나(任那), 탐라(耽羅), 태봉(泰封), 후백제(後百濟), 휴인(休忍), 비류(沸流), 정안(定安)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해동역사』는 지(志)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권17은 성력지(星曆志), 권18∼21은 예지(禮志), 권22는 악지(樂志), 권23은 병지(兵志), 권24는 형지(刑志), 권25는 식화지(食貨志), 권26∼27은 물산지(物産志), 권28은 풍속지(風俗志), 권29는 궁실지(宮室志), 권30∼31은 관씨지(官氏志), 권32는 석지(釋志), 권33∼41은 교빙지(交聘志), 권42∼59는 예문지(藝文志)이다. 총 85권 중에서 지가 43권인데, 그 중에서도 교빙지와 예문지가 반 이상이다. 예문지의 경우는 서법(書法), 비각(碑刻), 회화(繪畵) 등의 분야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문화 교류에 대한 설명이 많다.

이밖에 지의 특징은 국가제도 뿐 아니라 풍속과 방언, 민간 가옥과 같이 백성의 생활에 대한 내용을 많이 기술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상업과 국방에 대한 관심도 크다. 특히, 물산지에서 우리나라의 의식주 재료와 약재, 문방구, 화초 등을 소개하였다. 더불어 안설(按說)에서 품질과 상업적 가치, 그리고 대표산지까지 서술하였다. 교빙지와 병지에서는 해양 방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왜구, 왜란에 대한 서술에서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고(考)는 사실 고증에 역점을 둔 부분이다. 권60은 숙신씨고(肅愼氏考), 권61∼66은 비어고(備禦考), 권67∼70은 인물고이며, 속편 15권은 모두 지리고이다. 인물고에서는 백제 사람이 30인으로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서 얼마나 활약했고, 해외에 어느 정도로 알려졌는지가 수록 대상 인물을 선정하는 원칙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한진서가 서술한 지리고는 숙부인 한치윤의 서술 방식과 조금 다르다. 한치윤이 자료와 안설 중심의 기술을 했다면, 한진서는 결론부터 제시하고 자료와 안설을 덧붙였다. 그는 중국, 일본의 자료도 참고했지만,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疆域考)』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한진서가 지리고에서 다룬 내용을 몇 가지만 꼽으면, 백제의 위례성을 직산(稷山)이 아니라 한양(漢陽)과 광주(廣州)라고 비정한 점, 발해 발상지인 동모산(東牟山)을 영고탑(寧古塔) 부근으로 서술한 점, 고려시대 윤관(尹瓘) 9성(九城)의 위치를 두만강 남쪽으로 비정한 점 등이 있다.

5 『해동역사』의 사료적 가치와 평가

『해동역사』는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함께 조선 후기 실학자의 3대 역사서로 평가된다. 이상의 문헌들은 조선 후기 실학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고, 당대의 사회경제상도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역사서이다.

『해동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방대한 사료를 모아 분석한 후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귀납적으로 도출했고, 안설을 통한 저자 나름의 해석도 내렸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주요 자료로 채택했지만, 우리나라의 문헌과 비교하여 외국 자료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동아시아 한, 중, 일 삼국의 문화적 교류를 부각하여 설명하고, 서민의 문화를 정리했다는 점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그가 평생 자료 검증을 치열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위서(僞書)를 판별하지 못했다는 점, 중국과 일본의 자료를 활용하여 서술하는 과정에서 왜곡이나 오류를 걸러내지 못했다는 점 등에서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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