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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

1789년(정조 13)

현륭원 대표 이미지

화성 융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현륭원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이다. 영조는 세도세자가 죽은 뒤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수은(垂恩)이라고 했다. 정조는 즉위 이후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1815년(순조 15)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가 승하하자, 순조의 합봉 결정에 따라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1899년(광무 3) 고종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장조와 헌경왕후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은 융릉으로 봉릉되었다.

2 사도세자의 추숭과 영우원(永祐園)으로의 격상

사도세자는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영조가 41세 때인 1735년(영조 11)에 태어났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영조는 기쁜 마음에 곧바로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고, 이로 인해 노론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급기야 1762년(영조 38)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으로 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상세히 알게 되었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9일 만에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조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시호를 사도(思悼)로 내렸으며, 묘호를 수은(垂恩)이라고 하여 경기도 양주(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배봉산에 장사 지냈다. 그런 후에 영조는 세손(정조)을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왕통을 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즉위 후 추숭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먼저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垂恩廟)를 원(園)으로 격상하여 봉호를 영우원으로 하였다. 또한 사도세자의 사당은 영조가 1764년(영조 40) 봄에 한성부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에 세웠다가 여름에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으로 이전하고 수은묘라고 칭하였다. 정조는 이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개명한 후 사당이 비좁다고 하며 1776년(정조 즉위) 4월에 확장 공사를 시작하여 8월에 완공하였다. 정조는 세종이 종묘에 북장문(北墻門)을 두었던 것처럼 경모궁의 서쪽과 창경궁 북원 동편에다 일첨(日瞻), 월근(月覲), 유첨(逌瞻), 유근(逌覲) 등의 문을 두고 매달 살피곤 했다.

정조는 영우원의 비문을 직접 써서 내리고 1년에 두 차례씩 전배하여 작헌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경모궁과 영우원의 궁제(宮制)를 개정하여 경모궁의 위상을 다른 궁보다 높였고, 영우원의 원관은 별검(別檢), 참봉(參奉)이라 호칭하였다.

3 영우원, 수원 화산으로 옮기다

정조는 즉위한 후 계속해서 사도세자의 추숭을 행했지만, 영우원의 천장(遷葬)은 실시되지 못했다. 정조는 영우원 원침(園寢)의 형국이 좁다고 생각해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버지 묘의 이장은 신중해야 했기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재위 13년 만인 1789년(정조 13) 7월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영우원의 묘역이 매우 비좁고 초라하므로 천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이를 계기로 영우원의 천장이 결정되었다. 박명원은 영우원의 잔디가 말라죽고, 청룡(靑龍)의 능선이 뚫렸으며, 뒤를 받치고 있는 수세가 심하게 부딪치고, 뒤쪽의 석축(石築)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점을 이유로 들었다. 정조는 영우원을 천봉하기 위해서 50여 곳을 둘러보았고, 최종적으로 수원도호부에 있는 화산을 천장지로 결정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현재의 화성으로 영우원을 옮겨오면서 정조는 원호(園號)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새로 정하였다.

4 천장(遷葬)을 위한 정조의 철칙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은 수원 화산으로 옮겨진 후 현륭원(顯隆園)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현륭(顯隆)의 ‘현(顯)’은 크게 드러났다는 의미이며, ‘융(隆)’은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다. 현륭원이 위치한 곳은 일찍이 선조와 효종의 능침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었다. 여러 신하들은 능침의 형국이 ‘서려있는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 하며 동의하였다. 이러한 현륭원은 1789년(정조 13) 10월 16일 완공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는 데 하나의 철칙이 있었다. 그것은 천장에 소요되는 비용을 줄이고, 공역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되도록 관사의 군사들을 동원하였고, 상여를 끌고, 잔디를 떠내며, 각종 운반을 맡은 사람들에게 내탕고에 비치해 둔 돈으로 양식과 비용을 주었으며, 이들의 의복도 내탕고와 호조의 비용으로 만들어 주었다.

5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효성, 현륭원 조성

현륭원은 세자의 묘인 원(園)이었지만 왕릉에 버금가게 조성되었다. 조성에는 약 3개월이 걸렸다. 봉분은 동서북 3면에 곡장을 둘렀고, 모란과 연화문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다. 병풍석 주변에는 난간석을 별도로 두지 않았다. 왕릉에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간이 없었기 때문에 병풍석 상단 연꽃 봉우리 모양의 인석(引石)에 12방위를 표시하여 새겨 넣었다. 대부분 왕릉의 인석이 장대석의 네모난 형식으로 제작되었지만, 현륭원의 인석은 연꽃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장명등(長明燈),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무인석(武人石) 1쌍, 석수(石獸) 등이 배치되었다. 장명등은 종래의 사각이 아닌 팔각의 형태를 띠고 있어 장식요소가 많다. 장명등 정자석(頂子石, 장명등의 맨 위에 둥글게 다듬어서 얹어 놓은 돌)은 연꽃 봉우리에 2층의 연잎을 만든 후 8각의 처마를 만들었다. 망주석 역시 구름이나 모란 같은 각종 문양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기둥에는 세호(細虎, 망주석에 새겨 넣는 동물 문양)가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는 방향으로 조각되었다.

문인석은 관(冠)을 쓰고 홀(笏)을 꽂은 상을, 무인석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상을 만들었다. 무인석의 경우 다른 원(園)에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현륭원이 왕릉 급으로 조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석양(石羊)과 석마(石馬)는 서 있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석양의 경우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의 양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조각하였다. 석호(石虎)는 걸터앉은 상을 만들었다. 다물고 있는 입의 양쪽으로는 송곳니가 1개씩 표현되었다.

제향을 지내는 정자각,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인 예감(瘞嵌), 축문을 태우는 것을 바라보는 망료위(望燎位), 비각, 제물을 준비하는 수라간, 수복방, 판위(板位) 등의 부속시설이 있다. 정자각 동편의 비각은 뒷날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여 종묘에 배향되는 것을 대비하여 처음부터 2칸으로 만들었다. 비각 안에는 정조가 직접 지은 현륭원비가 세워져 있다. 비각 전면에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전서는 윤동섬(尹東暹)이 썼고, 정조가 지은 음기는 조돈(趙暾)이 썼다. 이 중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정자각, 비각, 홍살문이며, 수복방은 2002년에 새로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왕릉은 임금의 행차를 고려하여 80리, 지금의 40㎞ 안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임금의 원행도 80리를 넘을 수가 없었다. 현륭원은 도성과 88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정조는 이러한 현륭원을 자주 왕래하였다. 1795년(정조 20)에는 어머니인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현륭원에 갈 때에는 과천 주정소에 머물렀는데, 이때 인덕원(仁德院) 주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충을 묻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1790년(정조 14) 용주사를 창건하여 현륭원의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 창건에 앞서 정조가 직접 부지를 답사하였고, 건축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많은 재물과 토지를 마련하여 사도세자의 제향에 소홀함이 없게 하였다. 1792년(정조 16)에는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의 재실에 봉안하라고 명하였다. 현륭원에 어진 봉안각을 설치한 것은 아버지에게 못다 한 효를 영적으로나마 봉양하겠다는 뜻을 붙인 것이었다. 정조는 1년에 한 차례 배알할 때마다 아버지의 생각에 눈물을 쏟으며 차마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현륭원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합봉함으로써 합장묘가 되었으며, 1899년(광무 3) 고종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장조와 헌경왕후로 추숭하면서 융릉으로 봉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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