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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戶籍]

호구 조사 관련 공문서

미상

호적 대표 이미지

산청 단성현 호적장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호적(戶籍)은 호구 조사의 결과를 문서화한 것이다. 호구 조사의 기본 목적은 국가가 역역(力役)과 부세(賦稅)를 부과·징수하기 위해서였다. 호적은 각 군현별로 작성되며, 3년마다 개정되었다. 호적에는 호주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과 예속인의 이름·나이·직역·조상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17∼19세기 단성현 호적대장(丹城縣戶籍大帳)만 하더라도 25만 명 이상의 정보를 담고 있어 한 지역의 호적 자체가 갖는 분량이 상당하다.

2 호적, 고대사회에서부터 만들어지다

우리나라 호구 실태를 알 수 있는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33년에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문서이다.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695년(효소왕 4), 815년(헌덕왕 7), 875년(헌강왕 1) 등으로 여러 견해가 있는데, 장적에는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 지역)과 그 부근 4개 촌락의 호수(戶數), 면적, 인구, 우마(牛馬), 토지, 수목(樹木)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신라 촌락문서는 신라 통일기 무렵 국가의 수취체제와 당시 촌락민의 삶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

고려시대에는 주군(州郡)에서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호적을 작성하고 그것을 각도의 지방 장관인 안렴사(按廉使)에게 올려 보내면 안렴사는 다시 그것을 중앙의 호부(戶部)에 올렸다. 원칙적으로 식년마다 작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고려시대의 경우 남아 있는 호구 자료가 많지 않다. 우선 호적 작성 과정에서 개별 호에 보관하도록 한 호구단자(戶口單子)와 관에서 발급한 준호구(准戶口)가 23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실물 호구 자료가 아니라 족보나 가승(家乘)류에 전하는 것이다. 가장 앞선 시기의 호구자료는 1237년(고종 24)에 작성된 이교(李喬)의 호구자료이며, 대부분 13세기 이후에 작성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 화령부(和寧府, 현 함경남도 영흥)에서 이성계에게 발급된 호적 관련 문서들이 있는데, 현전하는 개인 호구 장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3 조선시대의 호구 조사와 호적 작성

호적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호구 조사부터 행해졌다. 호구 조사는 3년마다 오는 식년(式年, 子·卯·午·酉)에 시행되었고, 그에 따라 호적도 3년에 한 번씩 개편되었다. 다만 호적 작성 방식과 정리 기간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우선 한성부에서 관문(關文, 공문)과 사목(事目, 규정)을 마련하여 각 도 감영을 거쳐 각 읍에 전달하면, 각 읍에서는 호적청(戶籍廳) 혹은 호적소(戶籍所)를 설치하고 담당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이어 본격적으로 호구 조사가 시작되면, 각 호에서는 집에 거주하는 혈족과 예속인을 조사하여 호구단자(戶口單子)라는 신고서 2부[초단(草單, 호수가 최초 작성해서 제출한 것)]를 작성한 뒤 주현(州縣)의 관청에 제출하였다. 이어 주현에서는 기존 대장을 비롯한 관계 서류들을 대조하여 착오 여부를 확인한 후 정단(正單, 주현의 대조 작업을 거친 것) 2부를 만들었다. 이 중 1부는 호구단자를 제출한 각 호에 돌려보냈고, 다른 1부는 호적 중초(戶籍中草)를 만드는 데 활용하였다.

현재 호적 중초는 제주(濟州) 대정현(大鼎縣), 덕수리(德修里), 사계리(沙溪里) 등에 19세기의 것이 꽤 많이 남아 있고, 1750년 단성(丹城) 북면(北面) 신등리(新燈里), 19세기 남원(南原) 둔덕방(屯德坊) 등에도 호적중초가 있다. 또한 이주, 물고(物故, 죄를 지어 죽임을 당함), 도망(逃亡), 분가(分家) 등의 변동 사항을 기록한 각종 성책도 작성되었다. 참고로 『성책규식(成冊規式)』에는 29종의 성책 종류가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 후 호적소에서는 호구단자와 호적 중초를 수합하여 총 3벌의 호적대장을 완성하였다. 이 중 2벌은 한성부, 감영에 각기 보냈고, 1벌은 고을에서 보관하였다.

4 호적대장

호적대장은 중초에서의 수정 작업이 끝나면 정리된 내용을 정서하여 완성했다. 호적대장에 작성된 내용은 (1)작성일, (2)호의 소재지, (3)호주의 관직, 신분, 성명, 나이, 본관, 4조의 인적사항 등, (4)처의 성(姓), 나이, 본관, 4조의 인적사항 등 (5)자녀를 비롯한 동거인의 인적사항, (6)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전래 계통과 인적 사항 등이다.

조선시대 호적대장은 지역 단위의 책자로 전하고 있다. 주로 17세기 이후 경상도 지역의 것이 많다. 단성현 호적대장은 1606년(선조 39)부터 1888년(고종 25)까지 작성된 38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다른 지역의 호적대장에 비해 행정구역 전체를 망라할 뿐 아니라 작성된 식년이 연속된 자료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한 고을과 개별 가호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살필 수가 있다. 이외에 시계열이 연속한 호적대장으로는 대구부(大邱府), 울산부(蔚山府), 언양현(彦陽縣) 등의 자료가 있다.

그런데 호적대장에서의 호구는 지금의 전체 인구 동향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호적에 전체 호구가 기재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호적은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모두 부(賦)와 요(徭)의 근원”이라고 인식했듯이, 국역(國役)과 관련한 호구 파악의 산물로 여겨진다. 즉, 호구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원들인 셈이다. 또한 정약용은 백성들이 국역에 대한 부담 때문에 호적대장에 등재되는 것을 꺼려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자들은 호적대장에 실제 인구의 40% 정도만 기재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인구의 1/3 정도가 호적에서 누락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호적대장의 호(戶)의 특성에 대해 자연적으로 존재한 가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중앙정부의 특정한 원칙에 의해 편제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한편, 국가에서는 1호(戶), 1구(口)의 누락도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교집록(受敎輯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등의 법전에서 관련 조항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호구가 누락되거나 직역을 위조하는 등의 사례는 꾸준히 나타났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엄정하게 기록되지 못하는 사례들이 더욱 늘어났다. 게다가 위법 사항에 대해서 법전의 규정대로 처벌되는 경우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5 호구단자와 준호구

호적 자료는 호적대장 외에도 호구단자, 준호구가 있다.

호구단자는 앞서 설명한 대로 관청에 2부 제출했는데, 호주(戶主, 혹은 主戶)의 성명, 나이, 본관, 호주와 처(妻)의 사조(四祖, 부, 조, 증조, 외조), 가족, 노비의 현황 등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호구단자는 오늘날의 호적신고서와 비슷한 서류이다. 당시 호구단자는 호주가 작성한 것을 이전 식년 자료와 대조했을 뿐이다. 호적소의 관리들이 돌아다면서 실제 인구와 대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관계가 정확하게 반영되었는지는 미지수다. 일례로 호구단자에서 동일인의 출생 연도가 조사할 때마다 들쭉날쭉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현재 전해지는 호구단자는 대체로 호주 측에서 돌려받는 것들이다. 호주가 제출한 내용에서 수정이 행해지면 ‘주협자개인(周挾字改印)’이라는 도장이, 수정한 것이 없으면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또한 관인(官印)과 목사(牧使)의 수결(手決, 오늘날의 사인(sign)과 비슷한 부호)로 호구 내용을 증명했다. 호주 측은 돌려받은 호구단자를 신분 증명, 노비 소유 증명, 소송 등의 자료로 활용하였다.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비슷하다. 관청에서 개인의 호적 사항을 증명해 준 문서로, 개인이 소송, 직역 확인, 과거 응시 등의 여러 이유로 발급받았다. 준호구 양식은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규정되어 있다. 준호구는 발급 날짜를 밝히고 ‘본 관서는 몇 년에 작성된 호구 장적을 살핌. 주소·직역·성명·나이·본관, 사조의 관직·직역·이름, 처의 성씨·나이·본관, 처의 사조의 이름·관직·직역, 어머니·동생·자녀·며느리·사위 등 동거하는 식구의 이름과 나이, 노비·고공의 이름·나이·부모의 이름. 대조해 발급하는 것. 발급 관서, 책임자, 담당자’라는 내용을 기재한 후 여러 개의 관인을 찍고 해당 관인들이 수결을 했다. 그리고 수정한 곳이 있으면 말미에 밝혀 놓았다.

6 호적제도의 보완

호적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 호패법(號牌法), 인보법(隣保法),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등을 시행하였다. 우선 호패법은 16세 이상 양인 남성에게 호패라는 신분증을 갖고 다니게 한 것이다. 건국 초부터 호패 시행 관련 논의가 이어지다가 1413년(태종 13)부터 전국의 모든 백성이 호패를 찼다. 호패에는 성명, 신분, 연령, 주소 등을 새겼고, 관인을 날인하였다. 그러나 양인들은 과중한 국역 부담 때문에 호패 받기를 꺼려 하였고, 호패제는 자주 중단되었다.

인보법은 지역 자치 조직의 일종이다. 1407년(태종 7) 성석린(成石璘)은 백성의 생활과 인구 실태를 10호 정도를 1인보(隣保)로 구성하고 그 중 유력자를 정장(正長)으로 삼아 인보기(隣保記)를 비치하여 주민의 동태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주민 자치조직을 통해 호적을 보완하려는 시도는 오가작통법에서도 나타난다. 오가작통법은 5호(戶)를 1통(統)으로, 5통을 1리(里)로, 약간의 리를 하나의 면(面)으로 형성하여 면에 권농관(勸農官), 한성부에는 관령(管領)을 두어 호구의 동태를 보고하게 한 제도이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 전기에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1675년(숙종 1)에 이르러 오가작통 사목 21조를 마련한 후 유민(流民) 방지에 적극 활용되었다.

7 조선시대 호적의 역사적 가치

조선시대 호적은 사회경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호를 단위로 각 구성원의 나이, 직역 등의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어 가족관계, 혼인, 신분, 거주 양태 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3년마다 새로 작성되면서도 이전 호적 자료를 남겨 대조용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사회와 친족 구조의 변화상을 추적할 수 있다.

호적은 수취 구조와도 관련이 깊다. 조선시대 국역 운영은 신분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신분은 다시 직역 편성에 영향을 주었다. 호적에서 직역을 비롯하여 혈연관계가 구체적으로 표시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호적은 조선의 신분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해체된 후 일제강점기에도 호적에 ‘양반(兩班)’, ‘유생(儒生)’을 적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신분제적 전통은 강고하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변화로 신분제는 낡은 유산이 되었고, 가부장적 가족제도도 흔들렸다. 이에 호적의 중심인 호주의 위상이 약화되면서, 2008년 1월 1일 이후 호적은 폐지되었다. 지금은 작성 기준을 호주가 아닌 개인으로 바꾼 가족관계등록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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