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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조선의 의정부 관료들, 세계지도를 만들다

1402년(태종 2)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표 이미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모사본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개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로 알려져 있다. 1402년(태종 2)에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薈) 등이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지도들을 토대로 하여 새롭게 제작하였다. 지도의 이름은 온 세상의 영토와 역대 왕조들의 수도를 한데 그려 넣었다는 뜻을 의미한다. 지도에는 동아시아 전통의 중국 중심 세계관이 반영되었는데, 더불어 ‘혼일(混一)’이라는 단어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분하기보다는 혼연일체가 된 하나의 세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 그리고 지도에는 조선·중국·일본의 동북아시아 지역 뿐 아니라 서남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유럽 등지까지 포함되어 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의 세상, 즉 당시 인류가 알고 있던 세계를 거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필사본 4점, 일본에 있다

현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원도(原圖)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수정·보완한 지도들이 꽤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필사본은 4점 남아있는데, 모두 일본에 있다.

가장 유명한 교토(京都) 류코쿠(龍谷)대학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으로, 원도에 가장 근접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 나라현(奈良縣) 덴리(天理)대학 소장본 「대명국도(大明國圖)」, 구마모토현(熊本縣) 혼묘우지(本妙寺) 소장본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 나가사키현(長崎縣) 혼코우지(本光寺) 소장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이 있으며, 대개 15∼16세기 무렵에 제작되었다. 이상 4개의 필사본들은 일본, 유구국(琉球國) 부분에 조금 차이가 있지만, 구조와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국내에는 류코쿠대학 소장본을 모사한 사본이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

3 지도의 구성

각 필사본의 크기와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크기만 보면, 가장 큰 것은 혼코우지 소장본으로, 가로 280cm, 세로 220cm의 종이에 그려져 있다. 한편, 류코쿠대학 소장본은 가로 163cm, 세로 150cm의 비단에 그려져 있어 혼코우지 소장본보다 훨씬 작다.

이 류코쿠대학 소장본을 중심으로 지도의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육지는 엷은 황갈색,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채색하여 구분하였다. 국가명과 수도를 비롯한 각 지명은 원과 사각형의 빨간색 기호로 기재하였다.

지도의 맨 위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제목이 전서(篆書)로 크게 써져 있다. 또한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역대제왕국도(歷代帝王國都)’의 소제목 하에 수도 목록이 있는데, 몽골제국 치하의 성(省), 도(道) 등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골 지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중앙에는 거대한 중국이 표현되었다. ‘요도(堯都)’, ‘순도(舜都)’, ‘낙양(洛陽)’ 등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가 빨간색 원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지리 정보는 원나라의 것이다. 일부 지명만 명나라의 것으로 고쳤다.

중국의 오른쪽에는 실제 면적보다 크게 표현된 한반도가 있다. 한반도 중앙에 한양도성이 기호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안에 빨간색 바탕에 검은 글자로 ‘조선(朝鮮)’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의 해안선은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북쪽의 국경은 평평한 가로선 형태로 실제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의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중남부 해안선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고, 산맥의 줄기, 팔도 군현, 섬 이름도 상세하다. 대마도(對馬島)는 일본보다 조선에 더 가깝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다른 조선 지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 열도는 한반도의 아래쪽에 실제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교토의 위치에 ‘일본(日本)’ 국명이 표기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각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실제와 다르게 큐슈(九州)는 북쪽에, 아오모리(靑森)가 남쪽에 있다.

지도의 왼쪽 부분에는 아프리카 대륙, 아라비아반도 등이 있다. 중앙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것처럼 표현된 영역이 아프리카 대륙이고, 그 주변에 중동, 유럽, 러시아 지역이 그려져 있다. 각기 지명이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하단에는 권근이 48행 285자의 지문(誌文)을 썼다. 이 지문은 혼코우지 소장본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지도 제작 목적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천하는 매우 넓다. 안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밖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그 거리가 몇 천 몇 만 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를 줄여 몇 자[尺] 폭에 그리려면 상세히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지도가 대체로 소략하다. 〈중략〉 그 완성도가 정연하고 보기에 좋아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로서, 무엇보다 지도와 서적을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권근의 서술에 따르면, 기존 지도에 담긴 지리정보로 천하의 지리를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도와 지리지(地理誌)를 통해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국토 영역, 인구, 물산, 토지 등을 파악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치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리 인식은 천문 파악과도 관련되었다. 조선 초기에 천문과 지리 부문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이 제작된 것은 새로운 국가 조선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시기보다 앞선 1395년(태조4)에 만들어졌고, 그 발문 역시 권근이 지었다.

4 지도의 제작

권근의 지문에는 지도 제작시의 참여한 인물과 참고한 지도들도 기록되어 있다. 1402년(태종 2)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가 중국에서 들여온 이택민(李擇民, 1273∼1337)의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와 청준(淸濬, 1328∼1392)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연구하고 검상(檢詳) 이회(李薈)에게 명하여 조선과 일본 지도를 편집해서 하나의 지도로 만들게 하였다. 즉, 당시의 최신 지도를 입수하여 각각의 장점들을 조합하여 새 지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의정부 좌·우정승이 주축이 되었다는 것은 지도 제작이 국가의 주요 사업으로 진행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이 중국의 지도를 언제,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김사형이 1399년(정종 1)에 설장수(偰長壽)·하륜(河崙)과 함께 명 수도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실이 있어 그때 지도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관료들의 명 사행이 빈번했기 때문에 지도 입수가 어느 특정 사행에서 이루어졌다고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지도 제작 실무는 검상(檢詳) 이회(李薈)가 담당했다. 검상은 조선 초기 의정부에 소속되어 입법 관련 업무를 주로 맡았던 정5품 관직이었다. 또한 이회는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기도 했다. 원본이나 필사본이 없어 지도에 담긴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팔도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 지도 부분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에서 입수하여 참고하였다는 「성교광피도」, 「혼일강리도」도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성교광피도」는 원나라 이택민이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중국 외의 지역을 그린 지도, 「혼일강리도」는 승려 청준이 중국 역대 왕조의 강역과 도읍을 그린 지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에 참고한 일본 지도는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비주수(肥州守) 원상조(源詳助)에게서 입수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5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역사적 가치

기존의 연구들을 통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도를 통한 동서 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되었다. 중세 이슬람의 지도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그것이 조선에서 변형된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다. 중세 이슬람시대에는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지도학을 수용하여 지리학·지도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했던 몽골제국의 문화 전파가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에 따라 지도에는 서남아시아의 아라비아 반도가 길쭉하게 그려져 있고, 유럽의 지중해와 이베리아 반도 등도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15세기 초에 아프리카 대륙이 실제 지형과 거의 비슷하게 그려졌다는 것은 경이롭다.

하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현재 전하는 이슬람의 세계지도와는 또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다. 이슬람 세계지도는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두는 반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이슬람 지도에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동쪽을 향하도록 그리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에서는 지금의 실제 모습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이미 중국에서 수정된 내용으로 그려졌던 「성교광피도」를 바탕으로 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금의 모습에 가까운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그 당시 세계의 가장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은 지도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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