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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

옹성으로 둘러싸인 동대문

1396년(태조 5)

흥인지문 대표 이미지

서울 흥인지문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4대문 4소문 가운데 정동(正東) 쪽에 위치한 대문이다. 한양도성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동쪽에 위치하여 동대문으로도 불린다. 흥인지문은 조선 건국 직후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을 조성하면서 건설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수리, 보수되다가 1869년(고종 6) 개수된 이후 현재까지 그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도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아군이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2 한양도성의 건설과 흥인지문의 조성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한 후, 1395년(태조 4) 9월 종묘와 궁궐이 건설됨과 동시에 도성 건설이 진행되었다. 태조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성터를 정하게 하는 등 수도를 보호할 도성의 축조 계획을 시작하였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118,070명의 백성이 차출되어 1396년(태조 5) 1월 9일부터 도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았는데 높이가 15척, 길이가 19,200척이었다.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쌓았으며, 아래의 넓이는 24척, 위의 넓이는 18척, 높이가 25척, 길이가 40,300척이었다. 또한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인 운제(雲梯)를 쌓고 양편으로 석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도성은 49일 만인 2월 28일에 1차 완성되었다.

그러나 흥인지문의 경우 지형이 낮고 습지여서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밑에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뒤에 성을 쌓았으므로, 다른 도성보다 공력이 배나 되었다. 흥인지문의 공사는 경상도의 안동(安東)·성산(星山) 지역 사람들이 그 역사를 맡았다. 그러나 지형의 난점으로 공사가 지연된 상태에서 농사철이 시작되자 태조가 돌려보낸 것으로 보아 흥인지문 주변 성곽공사는 일부 완성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1396년 7월에는 장마로 인해 성곽이 허물어지는 곳이 여러 군데 발생하였고, 공사는 재개되었다.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인부 79,400명을 징발하여 성을 쌓았다.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은 토성을 석성으로 쌓았으며, 수구도 새로 쌓았고, 수량 조절을 위해 수구 1개소를 추가로 설치하는 등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각 문의 문루(門樓) 양쪽에 반달처럼 둥글게 낸 합문인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도성공사가 9월 24일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자, 문루의 이름을 유교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근거하여 명명하였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으로 하였고,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는데,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였다.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으로 명명했으며, 속칭 동대문이라 하였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으로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칭하였다.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으로 속칭 남대문이라 하였으며,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으로 하고 서소문(西小門)으로도 칭하였다.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인 1397년(태조 6)에 축조되었다. 그해 1월 태조는 동대문에 거둥하여 옹성을 쌓을 자리를 살폈고, 4월에는 흥인문에 거둥하여 완성된 옹성을 보고 성을 순행하였다. 약 3개월 만에 옹성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각 군영이 성문을 나누어 책임지게 하였다. 돈의문에서 창의문[자하문(紫霞門)]까지는 훈련도감이 담당하였으며, 숭례문에서 남소동 표석이 있는 데까지는 금위영이 담당하였다. 또한 남소동 표석에서 흥인문(興仁門)까지와 다시 응봉 숙정문(肅靖門)까지는 모두 어영청이 맡았다.

3 흥인지문의 보수와 건축적 특징

1396년(태조 5) 건립된 흥인지문은 1451년(문종 1) 3월에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군정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수리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에게 명하여 흥인문(興仁門)의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여 다시 보수공사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453년(단종 1)에는 1년 정도의 공사기간을 두고 흥인지문을 중수하였는데, 그 이유는 건물 자체의 문제보다는 동대문 지형이 지반이 약하여 지반 침하가 생기고 이에 따라 석축이 기울어지고 벌어졌기 때문이다. 1506년(연산군 12)에는 수구문(水口門)과 동대문 사이의 길가에 높은 언덕이 있어 성안이 바라보이므로 거둥할 때에 좋지 않으니, 성을 더 높이 쌓으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1869년(고종 6)에 이르러서는 노후를 이유로 전체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흥인지문은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흥인지문은 홍예문(虹霓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세웠다.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서울의 성문 가운데 숭례문과 흥인지문뿐이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뿐 아니라 유사시 군사를 지휘하는 시설의 역할도 하였다. 흥인지문의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바닥은 하층의 경우 중앙에만 마루를 깔았으며, 상층에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우물마루로 전체를 깔았다. 지붕은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고 추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흥인지문의 문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다. 문의 남쪽에서 불쑥하게 앞으로 굽어 나와서는 둥글게 껴안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서울 성문 가운데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흥인지문이 유일하다. 옹성은 북쪽 한쪽만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3면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옹성의 성벽은 화강석 마름돌을 이중으로 쌓은 뒤에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을 벽돌로 쌓았다. 여장에는 몸을 숨긴 채로 총을 쏘기 위하여 성벽, 보루 따위에 뚫어 놓은 구멍인 총안(銃眼)을 만들었다.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흥인지문에 옹성을 구축한 이유는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풍수적 목적도 있다. 경복궁의 경우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사산(四山)은 백악산, 인왕산, 낙산, 목멱산(남산)이다. 하지만 경복궁은 명당임에도 현무봉인 백악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이 낮고 약한 풍수상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가들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동쪽의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흥인지문에 옹성을 쌓은 것이다.

이와 같은 흥인지문은 1898년 경희궁 흥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전차가 개설되면서 변화를 맞이하였다. 1899년에는 이 전차궤도가 동쪽으로는 흥인지문의 홍예를 지나 옹성을 빠져나와 청량리역까지 연장되어 완성되었다. 서쪽으로는 흥화문에서 돈의문의 홍예를 지나 경기감영 앞 경교까지 노선이 확장되었다. 이후 흥인지문은 1907년(고종 44) 전차 선로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문 좌우측 성벽 8칸씩이 헐렸으나 문은 그대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4 흥인지문 현판의 비밀

한양도성 4대문의 명칭은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등 세 글자로 되어 있지만, 동대문만 흥인문과 흥인지문으로 불리고 있다. 현판에는 동대문만 ‘흥인지문’의 네 글자로 썼으며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되어있다. 흥인지문이란 현판의 글씨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쓴 것이다.

정조는 동대문의 편액을 다른 대문보다 한 글자 더 많게 한 것은 국도(國都)의 동쪽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편액의 글자를 한 자 더 많게 하고 그 성곽을 치성(雉城)으로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즉 한양 동쪽은 다른 삼면에 비해 물이 흘러나가므로 전체적으로 토대가 우묵하게 낮아, 지기가 약하기 때문에 그 기운을 북돋운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효종은 동대문 부근에 하도감(下都監)을 설치하고 훈련도감의 군병을 이 부근으로 옮겼으며, 정조도 효종 대 사례에 따라 장용영(壯勇營)을 동부 이현(梨峴)에 설치하고 소속 군사들을 통화문(通化門)과 이현 주변에 살도록 하였다. 이 같은 정조의 조치에 따라 창경궁 동쪽인 선인문(宣仁門)에서 남쪽으로 이현 동구까지의 궁성 지역에 장용영 군병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군병의 거주지는 이미 살고 있던 한성부민을 이사시키거나 가사를 매득하는 방법으로 마련되었다.

한편, 흥인지문 밖은 도성민에게 관광지이기도 했다. 흥인지문 밖의 울창한 버드나무는 살구꽃으로 유명한 필운대, 연꽃으로 유명한 천연정 등과 함께 서울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 또한, 흥인지문 밖에 우사단(雩祀壇)이 새워져 큰비가 내리면 기청제(祈晴祭)를 지내 비가 개기를 기원하였으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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