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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통제와 억압의 공간

1908년(순종 2)

서대문형무소 대표 이미지

해방 직후 서대문형무소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1908년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1987년 의왕시로 이전될 때까지 지배층의 통제와 억압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08년부터 1911년 사이, ‘경성감옥’에는 통감부(統監府)의 정책에 반대하는 많은 의병이 수감되었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이들 중 일부는 ‘서대문감옥’에서 받은 취조와 고문이 원인이 되어 순국하였다. 192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간주하고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여러 감옥에 수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에는 독재 및 군사정권에 맞선 인사들이 ‘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통제와 억압을 상징하던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의왕시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일부 건물들은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2 서대문형무소의 시작: ‘경성감옥’과 ‘서대문감옥’

1905년 러일전쟁이 종료된 후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었다. 그리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이것을 주도한 통감부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통감부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옥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고 새로운 감옥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1907년 12월 13일, 통감부의 압박을 받은 대한제국은 「감옥관제(監獄官制)」를 공포하였다.

이 법령 제1조에 의해 내부(內部) 산하 경무청(警務廳)에서 관할하던 감옥 사무가 법부(法部)로 이관되었다. 1907년 12월 27일에는 일본인이 주도하는 ‘경성감옥서(京城監獄署)’가 종로에 만들어졌다. 1908년 4월 11일 ‘경성감옥서’는 ‘경성감옥(京城監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같은 날 함흥, 공주,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에 ‘본감옥(本監獄)’이 설치되었다. 1908년 11월에는 주요 중ㆍ소 도시 8개 지역에 ‘분감옥(分監獄)’이 만들어졌다.

통감부와 일본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병전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이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경성감옥’에 수감되는 한국인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통감부는 ‘경성감옥’의 규모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논의 끝에 새로운 감옥을 서대문 현저동에 짓기로 결정하였다. 1908년 10월 19일 종로에 있던 ‘경성감옥’은 서대문으로 이전되었다. 감옥의 규모가 확장되면서 의병장 및 의병들의 수감이 늘어났다. 의병을 이끌던 허위(許蔿), 이강년(李康年), 이인영(李麟榮), 김구학(金龜學) 등은 재판소에서 사형 및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경성감옥’에서 복역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1908년부터 1911년 사이 ‘경성감옥’에 수감된 의병은 총 115명이었다. 이 중 58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한국 민족 운동가들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할 때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라고 발표하였다.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선천사건(宣川事件)’, ‘105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것을 빌미로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경성감옥’에 600여명의 인원이 수감되었다. 이 때 ‘경성감옥’의 1평당 수용인원은 5.1명을 초과했다.

조선총독부는 늘어나는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12년 9월 마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개설했다. 그리고 이 감옥을 ‘경성감옥’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서대문 현저동에 있었던 ‘경성감옥’은 이름을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으로 바꾸게 되었다.

‘서대문 감옥’에 수용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19년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 참여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1919년 당시 ‘서대문 감옥’에는 3,075명이 수용되었다. 이것은 1918년에 비해 약 65.68%가 증가된 수치였다. 민족대표 33인을 이끌었던 손병희(孫秉熙), 천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柳寬順)도 이때 수감되었으며, 이들은 ‘서대문 감옥’에서 받은 취조와 고문이 원인이 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3 식민지지배체제의 상징: 서대문형무소

1923년 5월 5일 조선총독부는 「부령(府令) 제72호」 를 발표하여 ‘감옥(監獄)’을 ‘형무소(刑務所)’로, ‘분감(分監)’을 ‘지소(支所)’로 바꿀 것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서대문감옥’의 명칭은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바뀌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의 수용인원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4년경까지 대대적으로 서대문형무소 옥사를 증축하였고, 부속시설들의 신축도 진행하였다.

1925년 4월 22일 일본에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 발표되었다. 이 법이 발표된 이유는 공산주의 운동과 그 영향 아래에 있던 노동운동 및 여러 사회운동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5월 25일부터 식민지 조선에서도 실행되게 되었다. 하지만 「치안유지법」이 적용되는 대상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달랐다.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한하여 이 법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더하여 민족주의자들도 「치안유지법」의 적용 대상이었다. 「치안유지법」의 적용대상이 확대되면서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많은 ‘사상범’들이 양산되게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들이 일반 수감자들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사상범’들과 일반 수감자를 분리시키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내에 새로운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1931년 10월 ‘서대문형무소’ 동남쪽에 약 4,400m²(1,320평), 2층 규모의 감옥이 지어졌으며, 1935년 5월에는 ‘사상범’ 전용 감옥인 ‘구치감’이 완공되었다. 1935년 현재 ‘서대문형무소’는 총 50여동의 건물, 외곽 높이 4m의 담장과 10m의 감시탑, 붉은 조적과 견고한 콘크리트 담장으로 구성된 대규모 감옥이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상범’으로 간주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사상범’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인 서대문형무소도 이들을 수용하기 부족했다. 서대문형무소 내 감옥 1평에 약 4명이 수감 될 정도로 공간이 협소했다. 또한 많은 수의 수감자들이 열악한 환경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병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감옥에 있던 간수들의 태도 역시 수감자들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간수들이 수감자들을 때리는 일은 일상적이었다. 사소한 일로 징벌을 하거나 음식을 줄이는 일도 빈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사상범’을 감옥에 모두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명확해졌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3년 ‘사상범’을 ‘전향((轉向)’하게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는 ‘사상범’들을 ‘충실한 신민’으로 교화시키고 그들을 식민지 통치에 활용하려고 하였다. 전향자에 한해서 ‘누진처우제((累進處遇制)’라는 승급 혜택을 주고 제한된 자유를 부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 방침을 따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분리하여 관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방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기관이었다.

4 해방 이후 서대문형무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석방되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서대문형무소’는 당분간 그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미 군정청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감옥 조직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해방 이후 ‘서울형무소’에는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행동을 했던 인사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또한 좌익계열의 인사들도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서울형무소’ 수감자가 급증했다. 그 이유는 이념 대립의 영향으로 좌익계열로 분류된 인사들이 많이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권을 부당하게 연장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인사들도 다수 감금된 것도 원인이었다. 제주도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4·3 사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난 ‘국회프락치 사건’ 등과 관련된 인사들도 ‘서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과 연관되었던 조봉암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61년 12월 23일 「행형법(行刑法)」이 개정되면서, ‘서울형무소’의 이름은 ‘서울교도소’로 바뀌었다. 1967년 7월 7일에는 교도소 직제가 개정되면서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과 연관된 많은 인사들이 ‘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일부 인사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1970년 말 현재 ‘서울구치소’의 수감인원은 총 4,435명이었는데, 이것은 전국 감옥 재소자의 12.55%를 차지하는 수치였다. 평당 수용인원을 살펴보면 평균 2.5~3.3명으로 수용 기준 2명을 초과했다. 이 시기에도 ‘서울구치소’는 일제강점기 때 ‘서대문형무소’처럼 가장 큰 감옥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이래 서울시의 인구는 급격하게 증대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구치소가 도심에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86년 ‘서울구치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義王市)로 옮기게 되었다.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되면서 11개동을 제외한 원형 옥사 및 부속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11개동이 철거되지 않은 이유는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988년, 11개 동 중 김구, 강우규,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렀던 제10, 제11, 제12사 감옥 건물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이 개원했으며, 1998년 11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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