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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한국 근·현대 역사의 현장

1892년(고종 29)

명동성당 대표 이미지

명동성당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종현 언덕 위에 들어선 명동성당

‘6년 간의 노고와 6만 불의 비용을 들인 끝에 대성당이 드디어 준공되었다. 대성당은 높이 141피트에 이르는 종탑과 함께 종현 언덕 꼭대기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 성당에 오르면 시야가 넓게 트여 있어서 바라보는 이에게 서울 장안의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1898년 6월 2일자 영문판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 가운데 일부를 추려서 옮긴 것이다. 이 기사에서 말한 대로 1898년 5월 29일에는 뮈텔(Gustav Charles Marie Mütel) 주교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의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건물의 길이는 68미터이고 너비는 29미터인데 종탑의 높이는 47미터에 달하였다. 당시 별달리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명동성당은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 때문에 ‘뾰족집’이란 이름으로 대번에 서울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2 명례방, 한국 천주교가 배태된 곳

1898년 명동성당이 세워진 곳은 당시 종현이라고 불리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명례방에 속한 곳이었다. 명례방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었던 명례궁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명치정(明治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명동으로 바뀌었다. 명동성당이라는 이름도 이때 붙여진 것이다. 해방 전까지는 종현성당 혹은 종현본당이라고 불렀다.

명례방은 천주교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지식인은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서학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처음 알게 되었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건너가 그라몽(Jean Joseph de Gramont)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이승훈은 귀국한 후 이벽(李檗), 이가환(李家煥), 정약종(丁若鍾)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벽의 수표교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 불편하여 명례방에 위치한 김범우(金範禹)의 집으로 옮겼다. 김범우는 역관 집안 출신으로 이벽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한 인물이다. 이승훈은 이곳에서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등 일종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운영하였다. 이처럼 김범우의 집에 세워진 집회소는 바티칸의 정식 인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사실상의 교회를 세운 매우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집회소는 그리 오래 운영되지는 못했다. 1785년(정조 9) 형조에 의해 김범우의 집이 적발되어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형조에서는 참석자는 해산시키고 집주인인 김범우만을 체포하였다. 그는 끝까지 신앙을 고집하였으며 그 결과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어 1년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따라서 그의 집이 위치했던 명례방은 한국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잊을 수 없는 곳이었으며 이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3 코스트 신부, 조선에 들어오다

명동성당 건립 당시 건축을 맡은 인물은 코스트 신부였다. 그는 1842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원래의 이름은 Eugene Jean Georges Coste였으며 한국식 이름은 고의선(高宜善)이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Paris Foreign Missions) 소속 신부로 1868년 사제로 서품되자마자 홍콩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875년 조선 교구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지만 곧바로 입국하지는 못했다. 그는 당시 만주에 머물고 있던 리델(Felix Clair Ridel)주교에게 가서 성서 번역과 한불사전 편찬 등의 사업을 돕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인쇄소를 운영하는 등 한동안 외곽에서 머물렀다. 그가 처음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85년(고종 22)의 일이다. 이때도 그는 민간인으로 변장을 하고 일본 기선을 얻어 타고 비밀리에 입국해야만 하였다.

그가 이렇게 비밀리에 입국한 것은 당시까지만 하여도 천주교의 포교가 아직 완전히 공인되지는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2년(고종 19)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었지만 여기에 종교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초창기 개신교 선교사들도 교사나 의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입국해야만 하였다. 천주교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코스트 신부에 앞서 조선에 들어온 블랑(Marie-Jean-Gustave Blanc) 신부나 드게트(Victor Marie Deguette) 신부도 비밀리에 입국해야만 하였으며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다.

코스트 신부가 입국한 이듬해인 1886년(고종 23)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신부들의 활동이 한층 자유롭게 되었다. 프랑스는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 포교 문제를 확약받으려 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난색을 표해 양측은 오랜 줄다리기를 해야만 하였다. 조선 정부는 결국 조약문 9조 2항에 ‘교회(敎誨)’라는 어구를 삽입하는 것을 통해 포교의 자유를 사실상 인정하고 말았다. 이후 코스트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은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코스트 신부는 조선에 들어와서 담당했던 역할은 당가부(當家部)였다. 당가부란 경리와 건축을 담당하는 부서였는데 불교로 치면 사판승(事判僧)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운영했던 인쇄소를 조선으로 옮겨와 성서 등의 보급을 담당하는 한편 여러 천주교 건물의 설계와 건축을 담당하였다. 당시 천주교에서는 사제교육의 한 과목으로 건축도 가르쳤으며 이를 전담하는 사제도 양성하였는데 코스트 신부도 이러한 건축전담 사제였던 셈이다. 그는 명동성당 건축 이전에도 여러 천주교 건축물의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였는데 주요한 건물로는 용산에 위치한 신학교와 현재 중림동에 위치한 약현성당을 들 수 있다. 용산신학교는 현재 사적 제5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현성당은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4 명동성당 어떻게 세워졌나

천주교 조선 교구는 1886년 조불 조약에 체결된 후 곧바로 대성당 건립에 나섰다. 이듬해인 1887년(고종 24) 5월 종현 일대를 대성당 건립 후보지로 선정하고 대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 땅은 병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윤정현(尹定鉉)의 옛집이라고 한다. 윤정현의 아버지는 윤행임(尹行恁)인데 그는 정조의 총신(寵臣)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조가 서거한 직후 일어난 신유박해 때 서학을 신봉한 것으로 의심받아 강진으로 유배된 바 있는 인물이다. 이처럼 대성당 부지로 선정된 땅은 천주교와 인연이 있는 집안이 소유했던 땅이었던 셈이다.

부지는 이렇게 일찌감치 마련하였지만 대성당을 건립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88년(고종 25) 1월 조선 정부는 종현의 성당 부지의 토지소유권을 억류하였다. 정부는 이 땅이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깝기 때문에 여기에 성당은 짓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표면적으로 영희전과의 거리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성당 건립이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 퍼져 있던 반외세 감정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서울에서는 외국 상인과 점포에 대한 철수운동이 벌어지는 등 뒤숭숭한 상태였다. 이 문제는 초대 프랑스 공사가 부임하자 그를 통해 강력히 항의한 결과 1890년(고종 27)에 들어서 비로소 해결될 수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된 후 곧바로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정지작업에는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1892년 5월 8일에는 새로 부임한 뮈텔 주교가 정초식을 집전하면서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설계와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다. 당시 벽돌공, 미장공, 목수 등 인력은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노동력으로 충당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서양식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훈련된 인력이 국내에는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중국 인력을 들여왔는데 1894년 청일 전쟁이 터지자 이들 모두 귀국하는 바람에 공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재정문제도 공사가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1893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5만 프랑을 대여해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공사를 맡았던 코스트 신부는 공사가 한창 막바지에 들어선 1896년 2월 사망하였다.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신부가 그의 뒤를 이어 공사를 진행하여 1898년 5월 29일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5 성당 지하의 순교자 묘지

이렇게 건립된 본관 건물은 세 개의 회중석을 갖춘 2층 라틴 십자형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주된 건축 재료로는 일반적인 고딕양식의 건물들과는 달리 석재가 아니라 벽돌을 썼으며 지붕은 동판으로 이었다. 석조건물에 비해서 장중함은 덜하지만 고딕적인 디테일을 추구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명동성당의 본관 건물 가운데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지상부분도 중요하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눈에 띄지 않는 지하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본관 지하에 순교자 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주교를 비롯하여 샤스탕(Jacques Chastan) 신부와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 등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앵베르 주교는 한국식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으로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었다. 1837년 조선에 잠입하여 전도활동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 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길에 방치되어 있다가 교인들이 20일 만에 목숨을 걸고 수습하여 현재 서강대가 위치한 노고산에 안장했으며 1843년에는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였다. 앵베르 주교 등의 유해는 1901년 삼성산에서 이곳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지하에 조성된 순교자 묘소에 안장되었다. 명동성당의 지하에는 이들 이외에도 1899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와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 외 무명 순교자 2위 등의 유해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렇게 명동성당은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한국 천주교의 피어린 순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진 곳이라고 할 수 있다.

6 한국 근현대사에서 명동성당

1898년 명동성당이 건립될 당시 경내에는 본관 이외에 주교관 건물이 있었다. 주교관은 본관에 앞서 1890년 이미 준공되어 있던 상태였다. 해방 이후 종현본당의 이름을 명동대성당으로 바꾸었으며 경내에는 문화관, 사제관, 교육관 등의 부속건물이 속속 들어섰다. 본관 건물도 벽체를 보수하고 스테인드글라스와 지붕동판을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수리를 통해 거듭나기를 하고 있다. 명동성당은 현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명동성당에는 서울대교구청을 비롯한 교회행정기관이 자리를 잡았으며 명동성당의 아래쪽에 위치한 가톨릭회관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천주교 단체와 기관들이 입주하였다. 명동성당은 명실상부한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명동성당 여기서 더 나아가 한국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으로서의 위상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1987년의 6월 민주화 운동 당시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명동성당은 그 이후로도 오래토록 사회적 약자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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