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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

한국 산업화의 상징이자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

미상

구로공단 대표 이미지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한국수출산업공단, 이른바 ‘구로공단’은 한국 산업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시행과 함께 건설된 한국 최초의 수도권 공업단지로서,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획기적 발전”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형성됐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더 나아가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성장의 대명사였고, 노동자들이 밀집된 곳이었기에 노동자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공업의 사양화로 1980년대 말부터 쇠퇴하다가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2 구로공단의 추진 배경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국가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수출 지향적 공업화 노선을 선택하였다. 이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새롭게 추진하려 하지만 투자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의 문제에 부닥쳤다. 국내 재원 조달방안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국은 대외정책 변화로 원조 감축이 이미 진행 중이었고, 선진국 차관 도입은 낮은 국가 신인도로 어려웠으며, 국교 정상화 협상이 교착된 상태에서 일본으로부터의 경제협력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재일교포기업가 중 일부가 양질의 저임금 노동력과 새로운 투자처가 산재해 있는 한국이 고수익을 보장하는 미개발지임을 인지하고 투자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투자재원을 구하는 한국정부와 새로운 투자대상을 찾는 재일교포 기업이 공존했지만, 양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어 교착국면이 이어졌다. 이때 해결사로‘한국경제인협회’(이하 ‘경협’) 인사들이 등장했다.

한국수출산업공단 관련 최초의 논의는 1963년 1월 8일에 경협의 주요 회원들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했던‘경제문제 간담회’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간담회에서는 공산품 수출 및 외자도입의 중요성이 논의되었다. 이튿날인 1월 9일 경협 임원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석하여 다시금 정부 관계자들에게 재일교포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여 공산품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방안과 경협 내에 수출산업위원회를 설치하여 수출산업진흥을 위한 여러 정책을 정부에 지속해서 건의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경협의 제안에 정부는 수출산업개발을 위한 총력 지원정책을 채택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63년 3월 7일 한국 최초로 수출산업 체질개선과 수출 진흥을 강력히 추진한다는 목적으로 구성한 ‘수출산업촉진위원회’ 발족식이 개최되었다. 수출산업촉진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1963년 3월 15일 수출산업실태조사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의 수출상황을 파악하고, 무엇보다 일본에서 사업체를 운영 중인 재일교포들을 만나 국내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만난 교포 기업가들은 공업단지 건설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수출산업촉진위원회의 임원들은 1963년 6월 22일 박정희 의장을 방문하여 “수출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재일교포들의 재산과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서울 근교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산업단지’를 설정”할 것과 이를 위한 특별 융자 및 법제도 단일화 등을 건의했다. 또한, 1963년 8월 1일‘경협’은 수출산업공단 설립계획서 및 건의서를 정부 당국에 제출하였다. 정부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1963년 8월 19일 무임소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수출산업공업단지육성위원회’를 설치하고, 관련 입법을 추진하는 등 수출산업공단 조성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이처럼 구로공단은 정부가 국외자본, 특히 재일교포 자본을 유치하고 저임금 노동력을 결합해 수출상품을 생산하는 보세가공기지로 개발하겠다는 정책 의지의 산물이었다. 즉, 구로공단은 재일교포 투자와 수출, 그리고 공업단지 건설이라는 서로 다른 발상들의 조합에 의해 조성되었다.

1963년 10월 26일 국내 최초로 공업단지 조성을 전담하게 될 민간단체인 ‘주식회사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정식 출범했다. 1964년 9월 14일 법률 제1656호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이후 이 법에 근거하여 주식회사 한국수출산업공단은 ‘사단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으로 바꿔서, 첫 사업으로 구로동에 제1단지를 조성했다.

3 구로공단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발전

구로공단의 제1단지는 1964~67년에 구로동에 조성되었고, 제2단지는 가리봉동 일대에 1967~68년에 조성되었다. 제3단지는 제2단지 인근 지역인 영등포구 가리봉동과 경기도 철산리 일대에 1970~73년에 조성됐다. 제1단지에는 31개 업체가 입주했다. 업종은 섬유·봉제, 전기·전자, 의료·정밀광학기기 및 시계제조업종으로 주로 노동집약적인 제품을 생산했다. 제2단지는 1969년 2개의 정부 지원기관과 33개 기업체가 입주했는데, 22개 업체가 입주한 섬유·봉제업종이 중심이었다. 제3단지 역시 1973년에 107개 기업에 분양이 완료됐는데, 섬유·봉제업종이 29개 업체로 가장 많았고, 전자·전기업종 25개 업체와 조립금속 14개 업체로서, 섬유·봉제, 전자·전기업종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구로공단은 재일교포의 국내투자 유치를 염두에 두고 조성되었다. 하지만, 제1단지는 1967년 말 18개가 유치되었던 교포 기업이 1971년에는 11개로 감소하였고, 제2단지는 조성 당시에는 추가적인 교포 기업유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재일교포 투자유치라는 조성목표는 어느새 사라지고 대신 수출 호조에 힘입어 국내 대기업이 수출산업에 투자를 본격화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구로공단은 1971년 한국의 전체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할 당시 1억 달러를 수출했고, 1977년 국가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시에도 구로공단에서만 1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1980년 구로공단 수출실적 역시 18.7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섬유·봉제 산업과 같은 경공업 대신 전기·기계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 공단의 주력 품목으로 새롭게 부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구로공단의 생산품이 국가 수출의 10%를 점유하였다.

1980년대 들어 구로공단의 입주업체 규모는 증가했다. 1982년에는 총 212업체가 입주해 있었다. 이를 1971년과 비교해 본다며 제1단지는 11개 업체가 증가하였고, 제3단지는 분양이 완료된 1973년에 비해 26개 업체가 증가하였다. 호황기인 1987년에는 업체 수 역시 증가하여, 제1단지는 54개 업체, 제2단지는 58개 업체, 제3단지에는 158개 업체가 있었다. 특히 제3단지에는 31개의 외국인 투자기업이 들어섰는데, 제3단지 입주업체 유치 시 외국 합작 투자업체를 최우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업종별 분포는 여전히 섬유·봉제업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전기·전자, 기타, 기계·장비의 순서였다. 약간의 변화는 출판부문의 비중이 1982년보다 1987년에 높아졌고, 의료·정밀 기기 등 생산부문 비중이 감소한 것이다.

한편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노동자들의 저항도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과 비인간적 대우 등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항했다. 1970년 태봉산업의 체납임금투쟁에서 시작해서, 크라운전자 노조결성투쟁, ㈜한국마벨의 노조결성투쟁, 대협의 임금인상 ․ 어용노조철폐투쟁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주로 봉제와 전자업종 사업장으로 임금인상, 노동조건개선, 노동조합결성 같은 요구가 중심이었다.

이어 1980년 3월 노동자들의 쟁의가 전국에서 분출하는 상황에서 구로공단에서도 대한광학,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등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남화전자, 서울통상(주) 등에서 노조를 결성했다. 이후 1985년 6월 22일 정부가 대우어패럴노조 노조간부3인을 구속하자, 이에 항의하여 6월 24일부터 대우어패럴노조, 효성물산노조, 가리봉전자노조, 선일섬유노조, 부흥사노조에서 동맹파업을 벌였다. 롬코리아, 삼성제약, 청계피복 등 5개노조는 지지투쟁을 벌였고, 민주화운동세력들도 전국 곳곳에서 지지투쟁을 벌였다. 이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파업이었다. 일주일 동안 전국을 들썩였던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구로공단은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뒤이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에 구로공단의 경우 46개 기업체에서 쟁의가 발생하였다. 1987년 8월부터 1989년 말까지 95개의 신규노조가 결성되었고, 46개 업체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노조들은 1989년 2월에 22개 노조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구로지구위원회를 결성하여 지역 차원의 공동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1980년대 구로공단은 노동운동의 ‘메카’로 변해갔다.

4 구로공단의 쇠퇴와 전환

이처럼 구로공단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산업화의 상징적 공간이었고, 또, 노동자 밀집 지역으로 198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다. 구로공단은 1988년 수출액 42억 달러로 성장의 정점을 찍었지만, 그 이후 꾸준히 수출 감소세를 보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임금상승, 3저 호황 이후 거시경제 불균형, 부동산가격 상승과 재개발 압력 등으로 1990년대 초부터 제조업 위주의 산업구조 쇠퇴가 뚜렷해졌다. 이에 대한 사업체들의 대응은 폐업, 또는 저임금을 찾아 지방이나 해외로 사업장을 이전하는 것이었다. 또, 봉제업종에서는 구조조정, 즉, 하청화나 소사장제 등을 통해 그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고 했다.

잇따른 폐업, 해고, 공장 이전으로 1978년 11만 명을 넘었던 공단 노동자 수는 3저 호황이 본격화된 1986년 71,000명, 1987년 73,195명, 그리고 1992년에 55,840명으로 점차 감소했다.

결국, 1990년대 중반 들어 정부는 구로공단을 노동집약적 제조업 중심에서 첨단산업과 서비스업 중심의 공단으로 재배치하는 일종의 ‘점진적인 산업구조 고도화’로 전환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가산업단지와 관련한 규제를 완화하고, 1996년 7월 「공업배치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시행령」개정을 통해 과거 제조업종만 입주할 수 있었던 공단지역의 기준을 완화하여 비제조업 부문인 IT 관련 업종의 공단 입주가 가능하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다양한 세제 지원을 통해 입주업체들을 지원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2000년 구로공단은 이름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꾸었다. 그 결과 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제조업으로 대변되는 구 산업과, 첨단지식산업인 신산업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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