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1권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를 내면서
권순형

혼인(marriage)이란 ‘사회적으로 승인된 영속적인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경제적 협력과 동거 관계를 수반한다.’고 일반적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나라에 따라서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여성과 여성의 결합도 혼인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어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이라는 혼인의 정의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또한 산 자와 죽은 자, 죽은 자와 죽은 자의 결합도 혼인으로 보아 동거나 경제적 협력 관계가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에 인류학에서는 혼인을 ‘여성이 낳은 아이가 양 당사자의 합법적 자녀라고 인정할 수 있는 남녀 관계의 결합’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종족과 국가가 있었고, 이들은 제각기 다른 혼인 제도를 갖고 있어서 사실 일률적으로 혼인을 정의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사회에서 승인한 혼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제도와 생물학적인 성관계는 분명히 구분되었으며, 아무리 원시적인 부족에서도 사회적으로 통제된 혼인 제도는 늘 존재했다. 즉, 혼인은 당대 사회에서 승인된 관계, 제도화된 관계로서 단순한 남녀의 성적 결합과는 구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혼인을 ‘두 성(姓)의 좋은 점을 합쳐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을 잇는 것’으로 보았다. 즉, 남녀의 결합이 아닌 두 집안의 결합이 혼인이며, 이는 혼(婚)과 인(姻)이라는 글자가 본래 신랑과 신부의 부모가 서로를 부르던 용어라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서양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게르만이나 앵글로색슨 족의 고대 유럽 사회에서는 혼인을 두 혈연 집단 사이의 약속으로 보았으며, 혼인 당사자의 의사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부대(新婦貸)는 신랑에게 신부에 대한 권한을 이양하는 데 대한 보상, 또는 딸을 양육해 온 데 대한 보답으로 이해되었다.

혼인과 결혼은 어떻게 다른가? 현재 혼인은 법률 용어 또는 인류학 등의 학술 용어로 쓰이는 데 반하여 결혼은 연애결혼이라는 말처럼 남녀가 부부 관계를 맺는 행위 또는 결혼 생활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러나 결혼은 근대에 들어와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한 혼인 관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번역된 말로, 일제강점기 이전의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이 책에서는 혼인을 전체 제목으로 하고, 본문에서는 조선시대까지는 혼인을, 개항 이후는 결혼이란 단어를 써서 시대적인 감성에 좀 더 충실하려 했다. 한편 연애(love)는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상태’라 정의된다. 따라서 연애를 사회 제도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과 방식이 시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연애 역시 사회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연애와 혼인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사회적으로 허용된 대상을 사회에서 규정한 방식으로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혼인이고 부부애일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대상을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불륜이며 지탄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금지된 사랑이라 하여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고대 이래 근대까지 이 같은 혼인과 연애의 이중주를, 그 양면성을 살펴보려 했다.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다양성’에서는 고대 사회의 혼인과 연애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대 사회에서 남녀의 만남이나 사랑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실제 혼인 관계를 형성할 때는 부모가 결정 권을 쥐고 있었으며 신분내혼(身分內婚)이라는 규칙이 중요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혼인을 공표하는 과정에서 혼인 의례도 필요했으나 서민들은 특별한 예식 없이 동거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혼인에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친족의 집단성과 골품제 같은 신분제 운영 원리가 크게 작용했다. 혼인은 개인끼리의 결합이 아니라 양편의 씨족 또는 가족이 주체가 된 집단끼리의 계약으로서, 그 관계는 혼인 당사자가 죽어도 해소되지 않아 취수혼(娶嫂婚)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친족 집단의 집단성이 점차 약화 변질되면서 취수혼은 점차 사라졌다. 근친혼은 골품 체제 내에서 신분내혼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였다.

배우자의 성에 대한 통제는 주로 여성에게 가해졌고, 남성은 다른 가족 질서를 깨지 않는 한 배우자 외의 성관계가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특히 투기를 강하게 규제했으며, 신라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투기나 간음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약해 비교적 자유로운 남녀 관계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에서는 불교 국가이며 귀족적인 특권이 존재했던 고려의 혼인에 대해 알아보았다. 혼인은 신분내혼이었으며, 특히 귀족은 몇몇 가문끼리 중첩된 혼인을 하여 지배층의 특권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간혹 지방의 한미한 집안 출신자가 과거에 급제한 뒤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이에 편입되기도 해 신분제 사회이면서도 신라와는 다른 개방성을 보였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만혼이나 독신자의 존재도 보인다. 혼인 거주는 중국과 달리 처가살이였으며, 여자 측의 혼인 비용 부담이 컸다. 한편 고려는 발해·송·거란·여진 등 외국과 교역이 활발하였고, 이들 나라 사람들이 귀화하였기 때문에 국제혼이 많았다. 원 간섭기에는 자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지만 이런 경향이 좀 더 늘어났다. 이에 고려의 혼인 문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국제적이고 다원적인 특성을 보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각종 불교 행사나 토속신에 대한 제사, 향도회 같은 모 임을 하면서 남녀가 만날 기회가 많았다. 여기에 남편 생전에만 정절을 지키면 된다는 의식 때문에 미혼자나 과부·홀아비 간의 연애가 눈에 많이 띈다. 이 모습은 고려 가요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고려 가요는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가 원 간섭기 궁중의 노래로 변질된 것으로, 진솔한 남녀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고려 가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배척되고 궁중악(宮中樂)에서도 배제된다.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에서는 조선시대에 성리학과 종법(宗法)이 강조되면서 국가가 혼인을 규제하고, 남녀 간의 사랑이 일탈되어 나타나게 됨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 혼인은 ‘인륜의 시작’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양천불혼(良賤不婚)·동성불혼(同姓不婚) 등으로 혼인 법제를 강화하고, 친영례(親迎禮)를 실시해 남귀여가(男歸女家) 풍속을 고치려 했다. 그러나 전통이 오래된 남귀여가혼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조선 중기가 지나서 반친영(半親迎) 형태로 절충되었다지만, 이 역시 처가살이의 틀을 바꾼 것이 아니다. 남귀여가혼은 두 집안의 긴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했으며, 부부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은 ‘예에는 두 아내가 없다(禮無二嫡)’는 원칙에 따라 일부일처(一夫一妻)를 법제화했다. 이에 고려 말의 다처 풍조는 사라지게 되고, 양반 여성은 첩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첩은 양인이나 천인 여성, 즉 기녀나 노비·얼녀 출신들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첩은 처와 마찬가지로 호(戶)의 구성원이었으나 온전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자식과 함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혼례식은 국초부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도록 했으나 전혀 지켜지지 않고, 3일에 걸쳐 잔치를 벌이는 전통적인 남귀여가 혼례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이 되면 중국의 혼속을 일부 받아들여 하루 만에 혼례식을 마치는 반친영으로 정착되었다. 첩을 들일 때도 간단하게나마 의례를 하여 혼인 의례가 강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혼례에 소용 되는 물품은 양반 간의 공조, 또는 향촌 단위의 공동 기금으로 마련했다. 혼례 비용과 혼수는 처가에서 의식을 치르고, 처가에서 오래 거주한 만큼 여성 측의 부담이 컸으나, 조선 말기로 갈수록 처가살이 기간이 짧아지면서 남성 측의 부담이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성에 대해서는 이중 규범이 적용되었다. 남성의 외정(外情)은 허용된 반면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요하여 간음을 중죄로 다스리고 남편 사후 재혼도 불허했다. 그리고 조선 말기로 갈수록 형벌이 강화되었으며, 하층 여성들에게까지 정절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되었다.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에서는 개항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혼인 풍속의 변화를 짚어 보았다. 근대에 들어와 부모가 주도하던 봉건적인 혼인은 크게 변화된다. 이제 혼인은 당사자의 자유연애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1920∼1930년대 초 신여성들은 자유연애·자유결혼을 봉건적 남녀 관계와 가족 제도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여성 해방의 큰 방도로 생각하고 적극 수용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조혼 풍습으로 이미 기혼자였던 남성과 연애하는 것은, 결국 그녀들을 죽음이나 도피 아니면 제2부인(첩)으로 내몰고 말았다.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노동 계급 여성은 늘 공장 내 성폭행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낭만적인 연애나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편 농촌 여성은 여전히 봉건적 폐습에 시달렸다. 조혼과 축첩은 개화기 이래 여러 선각자가 여성 해방의 걸림돌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동원 체제가 강화되면서 조혼은 더 기승을 부리고, 축첩 역시 자유분방한 성과 경제적 빈곤이 맞물려 더욱 증가했다.

1903년 이래 미국에 노동자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사진을 모국에 보내 신붓감을 구했다. 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사진 신부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미주 이민 1세대를 이루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내선 결혼(內鮮結婚)도 있었다. 이는 내선 융화 차원에서 정 책적으로 장려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생학적 견지에서 반대되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민족 개조론과 같은 맥락에서 일본인 여성과 혼인해 일본식 가정을 만들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조선 민족의 독자성이라는 차원에서 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선 결혼에 대해서는 일제 초부터 말기까지 각각 자신이 처한 처지에 따라 찬반 논란이 계속되었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문화사란 무엇인가’, ‘어떻게 쓰는 것이 문화사적인 서술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집필자끼리 초보적인 수준으로 합의한 것은 일단 분류사로서의 혼인사는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또 소재로서의 혼인사, 인간이 빠져 있는 혼인사는 서술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혼인과 연애란 현상을 통해 각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체를, 그 시대상과 역사성을 조망해 보려 하였다. 또한 혼인은 여성의 일생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혼인을 통해 고대 이래 근대까지 여성의 존재 형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이번 작업의 수확이라면,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그를 통한 좀 더 생생한 역사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제도 차원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의 문화사를 복원해 보려 했다. 이에 연구자들은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용하지 않은 고문서나 일기류, 문학 작품 등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시대를 뛰어넘는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전해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와 성과는 조선시대와 근대 부분의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조선시대의 연구는 발군이라 하겠다. 서민이나 노비 등 피지배층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감이 있고, 특히 이것은 위 시대로 갈수록 심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사료의 한계라 할 수밖에 없다.

2005년 8월

한경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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