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
  • 3. 부부 관계
  • 부부애
김선주

고구려 벽화 고분인 장천 1호분에는 전실 천장 모서리에 두광(頭光)을 배경으로 남녀 한 쌍의 얼굴이 연꽃 위에 올려져 있는 ‘연화화생부부도(蓮花化生夫婦圖)’가 그려져 있다. 이는 이승에서 부부로 만난 한 쌍이 내세에서도 함께 한 쌍의 부부로 태어나기를 축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벽화 고분에 묻힌 부부가 실제 유난히 사이가 좋은 부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부의 인연을 내세에서도 지속하려는 염원은 보는 사람에게 부부애에 대한 이상과 소망을 느끼게 한다. 흔히 부부간의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남편과 아내는 백년해로(百年偕老)하거나, 같은 무덤에 묻히겠다는 표현을 써서 자기들의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75)페트리사 에브레이, 배숙희 옮김, 『중국 여성의 결혼과 생활』, 삼지원, 2000, 252쪽. 이러한 말에는 부부의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는 모든 결혼의 이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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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 1호분 연화화생부부도
장천 1호분 연화화생부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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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에서도 이와 같이 같은 무덤에 묻힌다거나 백년해로 등으로 묘사된 부부애를 찾을 수 있다. 취수혼의 사례로 등장한 우씨는 죽으면서 첫 남편인 고국천왕이 아닌 뒤에 결합한 산상왕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76)『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8년. 그런데 이러한 유언은 취수혼 풍습에는 위배되는 것이었다. 『삼국지』 「오환조(烏桓條)」에는 “부형이 죽으면 의붓어머니나 형수를 처로 삼는데, 죽은 뒤에는 옛 남편에게 돌아간다.”라고 하여 취수혼에서 남편이 죽은 뒤 시동생의 아내가 될 수 있지만, 죽은 뒤에는 첫 남편에게 돌아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취수혼 풍습과 달리 우씨는 시동생인 산상왕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한 것이다. 유언에 따라 우씨를 산상왕 곁에 묻자, 당시 무당의 꿈에 우씨의 첫 남편인 고국천왕이 찾아와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싸움을 하였으며, 낯이 뜨거워 백성들을 볼 수 없으니 가려 달라고 했다 하여 무덤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고 한다. “행실을 잃어 무슨 면목으로 고국천왕을 보겠느냐.”는 윤리적인 이유를 들어 우씨는 산상왕 곁에 묻어 달라고 하였지만, 실제 우씨는 죽어서도 산상왕의 아내로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고국천왕이 죽은 후 취수혼을 해야 할 때에도 우씨는 관례에 따라 바로 밑의 시동생인 발기가 아니라 그 밑의 시동생으로 훗날 산상왕이 되는 연우를 선택하였다. 우씨는 평소 친밀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취수혼 사회에서 시동생 연우에게 원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고국천왕이 죽자 관습에 위배되는 무리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발기가 아닌 연우와 혼인했으며, 죽어서도 산상왕 곁에 묻히려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죽어서 한 무덤에 묻히고 싶어 한 대표적인 예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이다. 흥덕왕은 신라 왕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친혼을 하였다. 왕후인 장화왕후는 흥덕왕의 형인 소성왕의 딸로 조카와 삼촌 간의 근친혼이었다. 그런데 흥덕왕 즉위 초에 왕후가 죽었다. 그러자 흥덕왕은 왕후를 정목왕후로 추봉(追封)하고는 하루도 잊지 못하고 사모하여 즐거워하는 일이 없 었다고 한다. 주위 신하들이 새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권하자, 흥덕왕은 “외짝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 어찌 재혼을 하겠느냐.”며 거절하였으며, 시녀들까지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장화왕후가 사망한 지 11년 되던 해에 흥덕왕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먼저 죽은 장화왕후와 합장해 달라는 것이 유언이었다.77)『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흥덕왕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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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흥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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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문헌상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부부 합장의 첫 사례이다.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흥덕왕릉은 무덤 둘레에 십이지신상이 조각되고 무덤 앞에 문무인상이 배열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덤 근처에 비석이 세워졌던 귀부만 남아 있는데, 주위에서 무덤의 주인공이 흥덕왕임을 보여 주는 비편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살아생전 흥덕왕이 장화왕후와 애정 관계가 각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흥덕왕은 형인 헌덕왕과 함께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애장왕은 장화왕후와 친남매 사이였다. 이러한 아픔을 겪은 장화왕후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인지, 조카를 시해하고 왕위를 계승했다는 손가락질을 만회하기 위한 단순한 정치적인 몸짓이었 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흥덕왕은 배우자가 죽은 뒤에 재혼을 하지 않고 수절을 하다가,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혀 저승에서나마 생전에 못다 한 부부애를 이어가려 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다음 이야기는 설화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죽음을 넘어선 깊은 애정과 백년해로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라 최항은 자를 석남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첩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있더니 몇 달 후 죽었다. 8일 뒤 최항의 혼이 첩의 집에 갔는데, 첩은 최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최항은 머리에 꽂은 석남 가지를 나누어 첩에게 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살도록 허락하여 왔다.”고 하였다. 이에 첩은 최항을 따라 그의 집까지 갔다. 그런데 항은 담을 넘어간 뒤 새벽이 되어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그 집 사람이 여자가 온 까닭을 묻자 여자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 “그게 무슨 말이냐. 항이 죽은 지 이미 8일이 지났으며, 오늘이 장삿날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자는 “석남 가지를 나누어 꽂았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이에 관을 열어 보니 머리에 석남 가지가 꽂혀 있었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으며,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첩이 죽으려 하자 항이 다시 살아나서 백년해로하였다.

원래 설화집인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었던 이 이야기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전해 오고 있는데, 혼인 관계가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의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의 풍습처럼 당사자들 간의 자유로운 결합은 이루어졌지만, 그 후 남자 부모의 반대로 정식 부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주인공인 최항이 죽었는데, 그는 죽은 뒤에도 여자를 잊지 못하고 찾아가 석남 가지를 나눠 주었으며,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알고 함께 죽으려 할 정도로 서로 깊은 애정을 보였다. 결국 죽음도 초월한 이들의 사랑은 최항이 다시 살아나 백년해로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한편 신라의 문장가였던 강수 역시 20세 전에 관계를 맺은 야장의 딸과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백년해로를 하였다. 강수는 부모가 미천한 여자를 짝으로 삼는 것이 수치스럽다며 다른 여자를 중매하여 아내로 삼게 하려 하자, 가난하고 천한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워서 행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럽다며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강수의 아내 역시 남편이 죽은 뒤 나라에서 곡식 100석을 주려 하자 남편 덕분에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혼자 몸이 되어서 다시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를 지켜준 남편의 애정과 죽은 뒤 남편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아내의 겸손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리고 백제의 도미와 그의 아내는 왕의 공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백년해로한 대표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도미의 아내는 왕의 요구에 목숨을 걸고 항쟁을 하였으며, 결국 자신 때문에 눈이 먼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백제 땅을 떠나 낯선 고구려에서 살아야 했다.78)『삼국사기』 권48, 열전, 도미(都彌). 뿐만 아니라 이들은 부부의 신의를 지킨 대가로 사회적인 신분이나 경제적인 여유 대신 풀뿌리를 캐어먹고 살아야 하는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지만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혼인의 약속을 지키려 했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진평왕 때의 가실과 설씨 역시 ‘혼인의 약속’을 지켜 백년해로 한 사례이다. 진평왕 때에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설씨가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늙고 병든 아버지가 징병되어 멀리 나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때 사량부에 사는 가실이라는 청년이 설씨를 평소 흠모하였는데, 설씨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설씨의 아버지는 기뻐하며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하였다. 임무가 끝나고 돌아온 뒤에 혼례를 치르기로 하고 신표(信標)로 거울을 둘로 나누어 한 조각씩 가 졌다. 그러나 3년 기한을 넘기고 6년이 지나도 가실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아버지가 딸을 다른 사람과 혼인을 시키려 하자, 설씨는 신의를 앞세우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러한 차에 가실이 돌아오게 되어 두 사람은 혼인을 하고 백년해로하였다. 두 사람은 비록 혼인 약속만 한 상태이지만, 신의를 지키려 한 설씨 덕분에 백년해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79)『삼국사기』 권48, 열전, 설씨녀(薛氏女).

진흥왕 때의 백운과 제후는 어려서 부모들끼리 혼인을 약속하였다. 남자인 백운은 나이 14세에 국선(國仙)이 될 정도로 전도가 양양하였는데 15세에 눈이 멀게 되었다. 이에 제후의 부모는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제후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백운의 동료인 금천의 도움을 받아 백운과 만나 혼인의 약속을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면서 나라에서는 신의가 가상하다고 하여 작급(爵級)이 내려졌다는 것이다.80)『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6, 병술년. 어렸을 때 부모끼리 한 약속이지만, 혼인의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고대에도 백년해로라는 표현으로 살아생전에 깊은 부부애를 보이거나,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혀 부부의 인연을 계속하고 싶어 할 만큼 부부애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백년해로하는 부부애의 기저에는 약속에 대한 신의가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혼인의 약속만으로 설씨나 제후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으며, 최항이나 강수도 부모의 반대나 사회적인 편견이라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 번 맺은 인연에 대한 신의를 지켜 백년해로하는 부부애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도미의 처 역시 맹인 남편과 풀뿌리로 연명하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혼인의 신의를 끝까지 지켜내려 하였다.

그러나 혼인에 대한 신의는 대부분 살아 있는 동안에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신라 진지왕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도화녀를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러자 도화녀는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임금의 위엄 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남편에 대한 신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왕이 “남편이 없으면 가능하겠느냐?”고 하자, 도화녀는 가능하다고 대답하고 있다. 실제 남편이 죽은 뒤 진지왕이 혼령의 형태로 찾아오자 그와 관계하여 비형랑을 낳기에 이르렀다.81)『삼국유사』 권1, 기이, 도화녀 비형랑.

뿐만 아니라 고대 문헌 자료에는 유독 과부가 죽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는 사례가 종종 보인다. 설총(薛聰)은 과부인 요석공주와 원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82)『삼국유사』 권4, 의해, 원효불기(元曉不羈). 원효와 친하게 진했던 사복(蛇福) 역시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사는 과부가 남편 없이 아이를 임신하여 낳았다고 한다.83)『삼국유사』 권4, 의해, 원효불기. 백제의 무왕 역시 연못가에 살던 과부와 용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84)『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武王). 죽은 남편 외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에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문무왕 때 엄장은 친구인 광덕이 죽자 그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치른 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의하고, 이에 부인이 바로 승낙하여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85)『삼국유사』 권5, 감통, 광덕엄장(廣德嚴莊).

그렇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새로운 유교 윤리가 가정과 사회에서 폭넓게 퍼지면서, 사회적으로 남편 사후에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야 부부애를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은 김유신이 61세가 되던 해에 김유신과 혼인을 하였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이 죽자 비구니가 되어 절개를 지켰다.86)『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2년. 김흔의 처 역시 남편이 죽자 아들이 없어 장례를 주관했는데, 일이 끝난 뒤에는 비구니가 되었다.87)『삼국사기』 권44, 열전, 김양(金陽) 김흔부(金昕附). 특히 김유신의 부인 지소는 김유신이 죽은 뒤 김유신에게 용납되지 못했던 아들 원술이 찾아오자 “부인에게는 삼종(三從)의 도리가 있다. 내가 지금 과부가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겠지만 원술이 이미 돌아가신 남편에게 아들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88)『삼국사기』 권43, 열전, 김유신 하(金庾信下).라고 하여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같은 유교 윤리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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