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3. 국제혼과 문화 교류
  • 원나라와의 통혼 및 혼인 풍속의 변화
  • 혼인 풍속 및 제도의 변화
권순형

공녀 징발은 고려의 혼인 제도와 여성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조혼(早婚)의 성행이다. 다음의 사료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이 달에 탈타아(脫朶兒)가 제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하는데 대신의 가문에서만 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딸을 가진 자들은 두려워서 서로 앞 을 다투어 사위를 맞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대신의 집 가운데 두세 집을 적어 주어 탈타아 자신이 간택하게 하였다. 탈타아가 얼굴이 고운 자를 가린 결과 김련(金鍊)의 딸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그 집에서는 이미 사위를 데리고 있었으며, 그 사위는 두려워서 집을 나가 버렸다. ……나라 풍속에 나이가 어린 남자를 받아들여 자기 집에서 양육하여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는 것을 예서(預婿)라고 하였다.112)『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12년 2월.

다루가치 탈타아가 며느리를 구하려 하자 딸이 있는 집에서 서둘러 사위를 맞으려 했고, 이미 어린 사위를 맞은 집도 있었다. 조혼은 당시의 서류부가 풍속과 결합하여 예서제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정부에서는 공녀에 대한 대책으로 일부다처제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충렬왕 때 관리 박유(朴褕)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는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모두 처를 한 명만 두고 자식이 없는 자도 역시 감히 첩을 두지 못하나 다른 나라에서 온 자들은 처를 취함에 정해진 한도가 없으니, 인물이 앞으로 모두 북으로 흘러 들어갈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모든 관리에게 여러 처(庶妻)를 취하게 하되 그 품(品)에 따라 처의 수를 줄여 나가게 하여 서인에 이르러서는 처 하나에 첩 하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서처가 낳은 자식들도 적자와 마찬가지로 벼슬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원망이 해소되고 호구가 날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113)『고려사』 권106, 열전 박유.

고려는 일부일처(一夫一妻)를 취함에 비해 원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이들이 우리의 여자들을 공녀로 끌어가 인구가 줄어드니 모든 관리에게 여러 처를 취하게 하고 서민도 일처일첩(一妻一妾)을 두게 하자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히 논의했으나 오랜 일부일처 관습과 여성들의 반발로 법까지 제정하여 공식화하지는 못했다. 당시에 부녀자들은 박유가 다처 상소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원망하고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박유가 임금을 시종(侍從)하고 거리에 나가자 한 노파가 그를 알아보고 “다처를 두자고 한 자가 저 늙은이다.”라고 가리켰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해 거리가 손가락 천지였다고 했다. 그때 재상 가운데 처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어 이 법이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당시 공녀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으로, 그리고 원나라의 일부다처제의 영향을 받은 관료들에 의해 실제로 다처가 많이 행해졌고 사회적으로도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한편 원나라 사람과 고려 사람의 혼인으로 양국의 풍속이 섞이기 시작했다. 유밀과가 원나라 조정 잔치에 등장하기도 하고, ‘수라’와 같은 몽고 용어가 고려에서 쓰이기도 했다. 또 원나라의 풍속이 들어오면서 서모(庶母)를 취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충선왕은 아비의 후궁이던 숙창원비 김씨(淑昌院妃金氏)를 자신의 후궁으로 취했다. 충혜왕도 서모인 경화공주(慶花公主)와 수비 권씨(壽妃權氏)를 성폭행했다. 원나라에서 한인이나 색목인 등 이민족은 서모나 숙모, 형제 처와 혼인할 수 없었으나 몽고족 상층 사회, 특히 궁중은 예외였다.

이러한 풍습에 저항했던 사례도 있다.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중서평장사 고고대(庫庫岱)의 둘째 부인이 된 고려씨(高麗氏)는 남편 사후 첫째 부인의 아들이 그녀를 취하려하자 거절했다. 아들은 다시 권력가 백안(伯顔)의 힘을 빌려 일을 성사시키려했으나 고려씨는 밤에 담을 넘어 도망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그녀는 잡혀와 참혹하게 고문을 당했는데, 국공(國公)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114)도종의(陶宗儀), 「고려씨수절」,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15 ; 장동익, 『원대 여사 자료 집록(元代麗史資料集錄)』, 서울대 출판부, 1997, 83쪽.

또한 양국 간에는 학문 교류도 빈번했다. 원나라에 갔던 관리들을 통해 성리학이 도입되었고 신진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활발히 연구하였다. 이 결과 혼인에 대한 규제 범위나 강도도 좀 더 강화되었다. 근친혼에 대한 규제는 1308년에 왕실 및 문무 양반의 동성혼이 금지됨으로써 동성혼까지로 확대되었다. 동성 불혼제(同姓不婚制)의 성립은 곧 부계적 관념의 강화를 의미한다. 고려 전기의 근친 금혼은 대공친이나 소공친 등 당시에 가까운 친척이라고 여겨지는 일정한 친족 범위 밖의 사람과 하는 혼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성혼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은 ‘동성은 곧 근친’이라는 관념이 나타난 것으로서 부계 친족제로 기울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처족(妻族)이나 모족(母族)과는 중국에 비해 금혼 범위가 넓어115)충렬왕 때는 외종 형제와 통혼을 금지하고, 공민왕 때는 처제 및 이성 6촌 자매와 혼인을 금지했다. 우리 사회에 독특한 혼인 구조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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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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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처첩·적서 관념이 좀 더 강화되고, 친영제 실시, 고위 공직자 부인들의 재혼 금지116)『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호혼. 등이 주장되었다. 친영제는 기존의 처가살이 풍속이 시집살이 풍속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재혼 금지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만 한정되던 정절 관념이 남편이 죽은 뒤까지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려 말에는 원나라와 교류가 확대되어 국제혼이 한층 증가하고 양국의 풍속·학문·문화가 활발하게 교류되었다. 또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수용함으로써 정절 의식이나 처첩 관계·혼인·친족 구조 등 여러 면에서 부계 중심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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