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
  • 4. 고려 가요의 남녀상열지사
  • 궁중악으로 재창조된 민간의 노래
권순형

고려 말기가 되면 몽고와 벌인 오랜 전쟁과 원나라 풍속의 전래, 정치 기강의 문란과 사회의 혼란 등으로 성적으로 좀 더 문란하고 퇴폐적인 사회가 된다. 충렬왕은 소인의 무리를 좋아하고 잔치와 놀이를 즐겼으므로 측근들은 기악(妓樂)과 여색(女色)으로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힘썼다. 관현방(管絃房)의 태악재인(太樂才人)으로는 부족해서 신하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얼굴이 아름답고 기예가 있는 관기(官妓)를 선발했다. 또 노래와 춤을 잘하는 여자들을 뽑아 궁중에 두고 비단 옷을 입히고 말총갓을 씌워 따로 한 대열을 짓게 해 이를 남장(男粧)이라 불렀다. 이들에게 「쌍화점(雙花店)」이나 「사룡(蛇龍)」 같은 노래를 가르치고 검열하며, 소인 무리와 더불어 밤낮으로 가무를 하고 음탕하게 놀아서 더는 군신의 예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또 여기에 드는 경비와 비용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쌍화점」의 가사를 보면 고려 후기 사회의 문란과 퇴폐상이 잘 드러난다.

솽화뎜(雙花店)에 솽화(雙花)사라 가고신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휘휘(回回)아비 내손모글 주여이다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말이 이뎜(店)밧귀 나명들명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귀잔티 거츠니 업다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삼장(三藏寺)애 블혀라 가고신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뎔 샤쥬(事主)ㅣ 내손모글 주여이다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말미 이뎔밧긔 나명들명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삿기 상좌(上座)ㅣ 네 마리라 호리라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이후 후렴 생략)

드레우므레 무를길라 가고신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뭇룡(龍)이 내손모글 주여이다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말미 이우믈밧긔 나명들명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술풀지븨 수를사라 가고신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짓아비 내손모글 주여이다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말미 이집밧긔 나명들명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나며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싀구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조그마한 시궁 바가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이 노래에는 만두 가게를 경영하는 이슬람 상인, 삼장사 주지, 왕을 비유한 우물의 용, 술집 주인 등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노래에는 이 시기 무역과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좀 더 국제적이 된 고려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고, 한편으로는 각계각층에서 퇴폐가 만연했음도 잘 보여 준다.

고려 속요가 궁중에서 불린 것도 이 무렵이다. 궁중과 민간 양쪽을 왕래하는 악공과 기녀들을 매개로 민간에서 전승된 노래가 궁중악(宮中樂)인 속악정재(俗樂呈才)의 가사로 재창조되었다. 궁중의 속악 또는 향악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고려의 속악 가사는 앞뒤의 어느 시기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당악정재(唐樂呈才)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기품은 버리다시피 했고, 남녀 간의 사랑을 숨김없이 다룬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쌍화점 등의 속악 가사(俗樂歌詞)는 원천을 따진다면 하층 문화와 관련이 깊고 민요의 형태를 적지 않게 띠고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시대 특유의 상층 문화로 변모되고 속악정재의 공연 방식에 따라 개편되었으므로 이중성격이 있다. 즉, 민중의 감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동동」이나 「정석가(鄭石歌)」에서 보듯 임금을 축복하는 사설이 덧붙는 예 등이 그것이다.120)조동일, 「문학」,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1, 259∼261쪽. 고려 속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고려사』 「악지」를 편찬할 때 가사를 싣지 않았다. 그리고 궁중 연회 때도 다른 노래로 대체되어 성적인 면에서 좀 더 엄숙해졌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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