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1. 올바른 혼인
  • 처가에 거주한 실례
이순구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이따금 머리 들어 북촌을 바라보니

흰 구름 떠 있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어머니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한 신사임당의 유명한 시이다. 이 시는 흔히 신사임당이 친정에 들렀다가 서울로 가면서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두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말 집에 잠깐 다니러 왔다 가면서 지은 시가 이렇게까지 애절할 수 있을까? 이 시는 친정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면서 쓴 것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38세, 혼인한 지 거의 20년(1541) 만에 비로소 친정을 떠나 시댁으로 가면서 지은 것이다. 즉, 이제 잠시 시댁에 다녀온다는 개념이 아니라 시댁으로 완전히 살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이별이 그렇게까지 애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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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초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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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초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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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초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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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행장을 보면 혼인하고 2년(1524) 만에 잠시 서울 시댁에 인사하러 온 것을 볼 수 있으나, 서울 또는 시댁의 근거지였던 파주에 머문 기간이 그렇게 길어 보이지는 않는다. 남편을 따라 봉평에서 살았다든가, 율곡이 1536년 강릉에서 태어나 만 5세인 1541년 서울로 오게 되었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혼인 후 20년 동안 시댁에 머문 기간보다는 친정이나 그 근처에 거처한 기간이 훨씬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친정에 머물렀던 것이 아버지 신명화(申明和)가 사임당을 특별히 아껴서 보내지 않으려 했다든가, 아버지의 상(喪)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137)『국역 율곡전서』 ⅳ, 권18, 선비행장(先妣行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사실은 당시에 혼인 후 관행상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즉, 이때의 혼인은 남귀여가혼으로 대략 여자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은 자신의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왕복하는 형태였다. 아버 지 신명화가 서울 사람인데도, 혼인한 뒤에 서울과 강릉을 오가다가 끝내 강릉에 살게 된 것이라든지, 신명화의 막내 사위 권화(權和)가 결국은 장모 이씨 부인을 모시고 살았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당시 혼인 후 처가 쪽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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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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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조선 초기 인물인 김종직의 거주지 변화도 흥미롭다. 우선 김종직은 어머니의 고향인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선산이 고향이지만 박씨와 혼인한 후 밀양에서 계속 생활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21세에 금산(金山)의 조씨와 혼인한 후, 관직으로 서울 생활을 하는 외에는 대체로 처가가 있는 금산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아들 목아(木兒)가 죽자 금산의 장모 이씨의 묘 곁에 묻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벼슬살이를 쉬게 될 때나, 어머니 여묘살이를 마친 후에도 늘 금산의 농사(農舍)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혼인한 후 김종직의 주 거주지는 금산이었다. 그러나 모든 관직을 그만둔 후에는 노년을 금산이 아닌 밀양에서 보내는데, 이는 처 조씨가 먼저 죽어 재혼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직은 52세에 부인을 잃고 55세에 18세인 문극정(文克貞)의 딸과 재혼한다. 이때는 서울 명례동에서 생활하였는데, 혼인 후 바로 부인을 우귀(于歸)하게 한다. 김종직의 연보에서 문씨의 우귀를 특별히 기록한 것은 당시 이처럼 바로 우귀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우귀는 혼인 후 몇 년은 있어야 하며, 때로는 평생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김종직이 문씨를 바로 우귀하게 한 것은 본인이 나이가 많고, 지역이 고향이 아니었으며, 재혼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밖에 유희춘이 부인 집이 있는 담양에 근거를 둔 것, 손자 광선이 남원으로 장가든 것, 이문건의 부인 김씨가 서울 생활 중에도 빈번히 친정인 괴산에 출입하는 것과 손녀사위가 이문건의 유배지인 성주에 거처한 것 등, 조선시대 혼인 후 거주지가 처가 쪽이었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송나라의 정이(程頤)는 부모가 며느리 선택보다 딸의 남편을 찾아 주는 일에 더 신경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정이는 가문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후손을 키울 며느리 선택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도 송나라의 부모가 딸의 혼인에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딸은 집을 떠나 다른 집안으로 가서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남자들이 결혼과 관계없이 같은 집에 계속 머무는 반면, 여자들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혼하기 위해 한번은 움직여야 했는데, 그것이 부모에게는 대단히 우려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적어도 17세기 이전까지 혼인은 남자들에게 더 큰 변화를 주었다. 즉, 결혼하면서 새로운 주거지가 생기게 되고, 그곳이 어쩌면 자신이 일생 사는 곳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적어도 17세기까지 혼인 후 거주지 문제는 여자에게보다는 남자에게 더 큰 변수였다. 물론 조선 남자들이 혼인으로 겪는 변화가 중국에서 여자가 겪은 변화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거주지와 상관없이 가계의 대표성은 조선에서도 역시 남자 집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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