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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부 관계
  • 부부 관계가 돈독한 사례
이순구

『병자일기』의 작자 조씨 부인은 남편 남이웅(南以雄)이 선양(瀋陽)에 끌려가 있는 동안 하루도 남편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 참의까지 나오고 나면 영감께서 혼자 남으시게 되니 그 심회가 더욱 어떠하실까 하고 헤아려 보니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어느 약으로 이 답답함을 고치랴. 영감께서 나오신다는 기별만 있으면 반드시 시원해지리라. 이리 헤아리고 저리 헤아리니 정신이 얼음장 같아서 산이나 하늘만 바라고 지내나, 누운들 잠이 오며 비록 음식이 있다 한들 먹을 마음이 있으리오.”141)『병자일기』 정축년(1637) 11월 17일.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이 병이 될 정도에 이르는 것을 보면 조씨 부인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또 “꿈에 영감을 뵈옵고 서 로 희학(戲謔)하여 뵈오니 나오시는가? 이 기별이 선양으로 들어가는가?”142)『병자일기』 무인년(1638) 2월 29일.라는 말이 있는데, ‘희학한다’는 것은 서로 장난치며 즐거워했다는 뜻으로 평소 이들 부부가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남편이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들 부부에게 돈독한 유대가 없었다면, 이런 표현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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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태 부인의 편지
이응태 부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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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과 부인 송씨도 원만한 부부였다고 할 수 있다. 유희춘에게는 구질덕이라는 첩이 있었고, 그 사이에 얼녀(孼女)가 네 명이나 되었으나 부인 송덕봉과는 큰 갈등 없이 해로했다. 유희춘이 유배 시절 첩과 생활한 것에 대해 송씨가 언짢아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처첩 사이에 직접적인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송씨가 유희춘을 찾아 유배지로 갔을 때 첩은 이미 고향 해남으로 돌아가고 없었는데, 이는 첩 쪽에서 직접적인 대면을 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희춘 자신이 부인에 대한 배려로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린 후에도 첩은 해남에, 부인은 담양에 주로 거처하여 서로 부딪칠 일이 없도록 하였다. 아울러 유희춘은 항상 부인의 뜻을 존중하고 건강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부인 송씨의 월경(月經)이 47세에 끊어지자 유희춘은 걱정하여 대궐의 의녀 선복을 불러 이유를 알 아보게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만년에 태평함을 누리고 금슬이 더욱 좋아진다.”고 자평하며 만족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부인 송씨는 경사(經史)와 한시(漢詩)에 두루 능했으므로 그들은 서로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지기(知己)의 관계에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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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당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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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부 중 이러한 지기의 관계는 유희춘 부부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여성 성리학자인 강정일당(姜靜一堂)은 늘 남편과 학문적인 토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척독(尺牘)이라고 하는 일종의 쪽지 편지로 사랑에 있는 남편과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또 서로 학문을 독려했다. 당시 남편 윤광연(尹光演)은 정일당이 자기보다 글을 더 잘 짓는다고 생각하여 외부에서 부탁받은 글을 부인에게 대신 쓰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강정일당이 먼저 죽고 난 후에는 부인의 문집(文集)을 간행했다. 당시에 문집을 내는 것은 비용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고 하는데, 그 일을 감행한 것을 보면 윤광연이 부인을 지기로서 매우 존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17세기 초의 이여순(李女順)과 김자겸(金自兼)의 관계도 흥미롭다.

저는 이름이 영일이 아니고 여순입니다. 전 부사 이귀의 딸이고 죽은 유학 김자겸의 처입니다. 6, 7세부터 문자를 조금 알아 세상에는 마음이 없었고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또한 남녀로서 아이 낳고 사는 것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오직 도에만 마음을 두어 8∼9년 공부를 하다 보니 조금 얻은 바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지기(志氣)가 비범하고 일찍 선학(禪學)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저를 아내의 도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오언관(吳彦寬)은 도를 같이 공부하는 친구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당신 같은 처가 있고 오언관 같은 친구가 있으니 나의 일생의 행운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앉아서 종일 도를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겸이 무신년에 죽었는데, 죽기 전날 옆에 사람에게 말하기를 ‘아마도 나는 내일 죽을 것 같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다음날 죽었습니다. 임종 전에 오언관에게 말하기를, ‘내 처가 있으니 나는 죽지 않은 것이네. 그대는 세상 말에 신경 쓰지 말고 모름지기 도를 위해 지금처럼 방문하게.’라고 하니 오언관이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 때때로 와서 만나고 도를 논하고 공부를 하여 오래도록 쇠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오대산에 여승이 많다는 말을 듣고 가 보려고 하였으나 가보지 못하였는데, 지난 4월 오언관이 산으로 유람 간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따라가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시어머님과 친정 부모님께 편지를 남기고 별도로 노비를 데리고 길을 나서 덕유산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마침내 촌민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143)『광해군일기』 권81, 광해군 6년 8월 기해.

이여순과 남편 김자겸은 대표적인 학문적 동반자 관계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부부에게 더 재미있는 것은 오언관이라는 남편 친구의 존재이다. 김자겸은 부인이 자신과 지기처럼 지낼 뿐 아니라 자신의 친구와도 학문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남녀 관계를 넘어선 전형적인 지기 관계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부부 관계가 이렇게 좋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앞의 우호 관계의 가능성에서 봤듯이 조선의 부부는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 함께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관계를 더 많이 확보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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