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다양한 애정 행각, 간통과 성폭행
  • 동성애자, 세종의 며느리
이성임

1436년 세종은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奉氏)를 폐출시켰다. 이유는 봉씨가 궁녀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봉씨의 상대였던 소쌍(召雙)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206)『세종실록』 권75, 세종 18년 10월 무자.

봉씨는 본래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 후 곧 세종이 며느리 교육을 위해 여사(女師)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는데, 봉씨가 이를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 하면서 학업 받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고 한다.207)『세종실록』 권75, 세종 18년 11월 무술. 또한 금슬이 좋지 않아 세자가 자주 찾지 않자 궁중의 여종에게 밤마다 세자가 찾아오도록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얼마 후 세 명의 후궁을 들이게 되었다. 후궁을 들인 후에 봉씨는 우울해할 뿐 아니라 투기가 심하여 술을 마신다거나 궁인을 구타하는 등의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소쌍과의 동성애 사건이 알려져 폐출된 것이다.

이 폐출 과정을 보면 봉씨는 자신의 의지가 매우 강한 여성이었다. 특히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고 적극적이었으며, 투기가 심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러한 욕구가 남편을 통하여 제대로 실현되지 않자 대상을 궁녀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소쌍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여 독점적인 소유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208)이순구,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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