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3장 정비된 혼인, 일탈된 성
  • 3. 불안정한 사랑 그리고 성
  • 다양한 애정 행각, 간통과 성폭행
  • 간통·성폭행에 대한 처벌
이성임

간통이란 일반적으로 합법적인 혼인이 성립된 기혼 남녀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불법적인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일컫는다. 반면에 성폭행은 강제적인 성행위, 성을 매개로 하는 폭력을 의미하며, 때로는 겁탈이 성폭행을 뜻하기도 하였다. 간통과 성폭행의 차이는 남녀 모두 성관계를 할 의사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 초기에는 간통에 대한 처벌은 장 80이나 90의 형벌을 남녀 모두에게 부과했다.209)『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 범간(犯奸).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형벌은 더욱 강화되었고 남녀 간에도 차별을 두었다. 더구나 양반 부녀자는 더욱 엄격하게 교수형으로 처벌하고, 일반 양녀는 관비로, 천인은 유배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 간통이나 성폭행에 대한 처벌이 유례없이 엄하였던 것은 정절의 훼손을 지극히 중대한 사안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성폭행 범죄는 『대명률(大明律)』의 규정에 따라 신분에 관계없이 교수형을 부과했고, 성폭행 미수에는 장형과 유배형이 함께 부과되었던 데 반해, 조선 후기에는 피지배층 여성을 겁탈하면 전기와 마찬가지로 교수형을 부과하였으며, 양반 부녀자를 겁탈하면 성폭행 성립 여부에 관계없이 참형을 부과하도록 규정하였다. 양반층의 간통 사례는 조선 전기에 비하여 후기에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정절 관념의 강화에도 원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간통 행위 자체가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문의 명예와 관련되는 간통 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간통한 여성을 자살하게 하거나 직접 살해하기도 하였다.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어머니가 노와 간통했다는 추문이 퍼지자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나온다. 1576년 1월에 하세헌(河世憲)이라는 자가 자기 어미가 과부로 있으면서 노자와 간통하였다는 추문이 널리 퍼지자 그의 처남 하현령(河玄齡)과 모의하여 어미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결국 세헌과 현령은 잡혀서 형조로 끌려갔다.210)『미암일기』 1576년 1월 13일. 일기의 내용이 간단하여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아들 세헌은 어머니와 노의 관계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어머니를 살해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면 양반 부녀자가 노와 간통한 경우는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되었을까? 이러한 경우 법제상으로는 가차 없이 교수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지만 실록이나 여타의 기록에는 이와 관련된 사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건이 좀 더 철저하게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사족의 처는 아니지만 사족의 첩과 노가 간통한 사례가 확인된다. 1571년 7월 경산(慶山)의 첩이 간통하였는데, 그 상대가 노였다. 경산은 이문건과 친분이 있는 양반이었다. 사족의 첩과 자신의 노가 간통을 하자 노는 죽임을 당했고 첩은 관아로 끌려가 장 130대를 맞고 풀려났다.211)『묵재일기』 1561년 7월 24일. 이 경우도 『대명률』의 규정보다 엄중한 처벌이다. 그러나 상대가 첩이 아니라 처였다면 곧바로 참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러면 하 층민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조선 초·말기를 통해 하층 여성의 간통에는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실록이나 다른 문헌에는 이들의 간통 사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을수록 간통은 더 많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만 이들의 간통 사건은 위정자의 관심 밖의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사족층에게 요구되었던 성도덕이 천인층으로 확대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층민의 간통이나 성폭행은 일반적인 법에 따라 처벌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묵재일기』에는 두 건의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1561년 윤5월에 강릉에서는 역자(驛子)가 자신의 계모를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내용은 평능역의 역자가 과부가 된 계모를 성폭행하려 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발각될까 두려워 계모를 살해하였다. 아들은 결국 끌려가 법에 따라 처벌되었다. 또한 울산에서는 역자의 처가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즉,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간통하자 남편을 도끼로 찍어 죽였다. 결국 이 여자도 서울로 끌려가 처벌을 받았다.212)『묵재일기』 1561년 윤 5월 8일.

두 사건 모두 간통·성폭행과 관련하여 벌어진 살인 사건이지만 일반적인 형률에 따라 처벌되고 있다. 양반 위정자들의 관심은 사건 자체보다는 차후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다. 강상과 관련된 살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곳 수령의 관직이 유지될까 하는 문제였다. 당시 강릉 부사는 이미 파직되었고, 울산 현감은 수령직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약용의 『흠흠심서(欽欽新書)』에는 19세기에 일어난 다양한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144건의 살인 사건 가운데 여성의 성이나 정절과 관련된 것이 29건으로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실제 간통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으나 소문이나 풍문만 듣고도 자살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다. 하층민에게도 정절 관념은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다.213)김선경, 「조선 후기 여성의 성 : 감시와 처벌」, 『역사연구』 8, 2000.

조선의 위정자들은 성에 대해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양반 여성의 정절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통이나 성 폭행은 살인 사건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졌다. 조선 말기로 가면 정절 관념은 하층 여성에게까지 내면화되었으며, 이들의 극단적인 정절 관념은 여성을 사지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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