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
  • 이상적 혼인론과 혼인의 실상
  • 이상적인 남편상과 혼인의 조건
신영숙

신여성 중심의 이상적인 ‘새로운 결혼관’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유연애에 따른 자유 혼인을 구가(謳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지배 정책과 맞물려 강화된 가부장제적 현실은 혼인에 따른 여러 가지 모순과 폐해를 초래하였다. 예컨대 연애와 결혼을 별개로 생각하는 풍조도 나타났다.253)정순정, 「당세 여학생 기질」, 『신동아』 1932년 12월. 이와 같은 풍조는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져 여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90%가 결혼과 연애가 별개라고 답하여 신여성도 우려할 정도였다.254)윤성상, 「결혼은 연애의 결실이기를 믿는다」, 『여성』 3권 5호, 1938년 5월, 31∼35쪽. 그것은 당시의 불안한 사회 제도, 고루한 인습으로 결혼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반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신여성이 그린 이상적인 남편상은 직업·수입·성격·교양·산아 제한의 가부(可否) 등의 문제로 종합해 볼 때 ‘떳떳한 직업인, 예절을 찾을 수 있을 만큼의 수입 보장,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이해하는 사람, 예술적 취미, 용감하고 의로운 성격, 정조를 지키는 남자, 자기 일을 자신이 하고 부르주아적 향락만 추구하지 않을 것, 학식과 교양은 적어도 여성과 비슷할 것’ 등이 제시되었다.255)이동 좌담, 「내가 이상하는 남편」, 『신여성』 5권 12호, 1931년 12월. 38∼46쪽.

1938년에 이화여전·이화보육·경성보육 등 전문학교 졸업생 89명을 상대로 용모·체격·신장·연령·성격·취미·교육 수준·직업·수입·자산·장남 여부·지방 등의 12개 항목에 대해 조사하였다. 이때 ‘인상 좋고 건강한 체격의 소유자로 2만 원 가량의 자산에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 월수 80원 이상의 쾌활하고 문예와 스포츠를 이해하는 경기 이북 출신, 25∼26세의 차남’이라는 이상형이 나오기도 하였다.256)「오늘의 인텔리 결혼 적령기 처녀의 이상남」, 『여성』 3권 3호, 1938년 3월, 30∼35쪽. 그 밖에도 혼인의 조건으로 혈통·성병 등이 거론되는가 하면 지나치게 가문을 중시하거나 우생학적 생물학주의를 무조건 따르는 것도 잘못이라고 주의하는 등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혼인을 추구하기도 하였다.257)신영숙, 앞의 글. 이상과 같은 혼인 조건은 오늘날 기준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혼인 방법에서는 중매와 연애를 절충한 방식이 많았고, 결혼을 위한 남녀 교제 기간은 길게는 4∼5년, 본격적인 연애 기간은 5∼6개월 정도였다. 이때 중매와 연애의 절충식이란 대체로 지식인층 남녀가 주변의 소개로 만난 후 연애하는 경우를 말했다. 그리고 결혼 소개소가 등장하여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였다.258)편집실, 「결혼 소개소」, 『여성』 4권 5호, 1939년 5월, 84쪽. 여성 잡지가 매달 중매를 서겠다고 나서며 연령, 학력, 직업, 나의 구혼 조건(몸, 가정 형편, 재산 형편 등)에 대해 주소와 이름을 명기하여 신청하도록 하였다.

1923년 7월 1일에 내린 민사령(民事令) 제2조 제2항은 혼인 신고를 해야만 부부라는 승인을 얻는 법적 규정이었다. 이는 곧 혼인식을 했는지 여부나 전통적인 혼인 관념과는 사뭇 다른 근대법적 혼인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약혼 파기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리는 일과 사실혼 인정을 위한 혼인 예약, 즉 등록 혼인으로 약혼한 동거 생활도 법적으로는 보호한다고 하였다. 또한 혼인 요건으로는, 첫째 법정 혼인 연령은 남 17세·여 15세이며, 약혼에는 연령 제한이 없었다. 둘째 중혼(重婚) 금지, 셋째 상간자(相姦者) 사이의 혼인 금지, 넷째 혼인 당사자끼리의 합의, 다섯째 동성동본(同姓同本) 혼인 금지, 여섯째 부모의 허락, 일곱째 호주의 동의 등이 있었다. 이상의 조건을 모두 갖춘 뒤에도 혼인계(婚姻屆)를 내지 않으면 혼인이 성립하지 않았다.259)『여성』 2권 11호, 1937년 11월, 66∼69쪽.

전통적 혼인이 근대적·법적 혼인으로 변하고 그 안에 자유연애·자유결혼이라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전통적 혼인 관습은 존중되고 있었다. 이로써 혼인에 대한 전통적·근대적 의식이 갈등하면서 당시의 혼인은 난맥상을 띠었고, 당사자들 특히 여성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 주기 일쑤였다.260)신형철, 「현하에 당면한 조선 여성의 3대난」, 『신여성』 5권 11호, 1931년 11월, 11∼16쪽. 당시 여성의 3대난은 바로 교육, 직업, 혼인의 어려움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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