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 제4장 결혼에 비친 근대
  • 2. 자유연애·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
  • 이상적 혼인론과 혼인의 실상
  • 고달픈 맞벌이 부부와 양면적인 현모양처론
신영숙

이 시기 여성 교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모양처론으로 일관하였다. 교육 내용은 근대적 성별 분업을 체계화한 것이었지만, 당시 여학생들은 오히려 가사 과목에는 흥미가 없었다.274)『동아일보』 1928년 1월 7일자. 일본식 ‘가정’ 개념이 도입되고 내조자 아내와 바깥일을 하는 남편이라는 명확한 성별 분업이 강조됨에 따라 남편의 시중을 충실히 드는 부인상이 부각되었다.275)『우리의 가정』 창간호, 1913년 12월. 가정은 여전히 사회의 근본으로, 이는 부부로부터 비롯되므로 혼인은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고, 그래서 부부의 화목과 화평은 계속 강조되었다. 더욱이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강화되는 보수적 분위기에서 모성이 중시되었고, 대다수 여성은 오늘날의 여성이 당면한 문제와 비슷하게 남성 중심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를 경험해야 했다. 그와 같은 사회 구조와 풍조 속에 현모양처를 둘러싼 근대적 부부 논의는 일정한 갈등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시집만 가면 먼저 남편부터 들볶는 ‘모던 - 껄’이 많다. 악을 고래고래 질러 동네방네 떠들썩하여 밤에 잠을 못 이루게 하나니, 만약 ‘여성 푸로파간다 시대’가 오면 유리집을 짓고 남편을 들볶는 광경을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보이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276)「여성 전성 시대가」 4, 『조선일보』 1930년 1월 15일자 .

“가정불화는 남편이 밤늦게 들어오는 때부터이니 여기서 아씨님의 질투가 있다. 33년에는 한 동리, 동리마다 아씨님들이 모여서 놀대로 놀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들을 증치하기 위하야 당번을 내어, 그 당번이 밤이면 집집마다 대문을 자물쇠로 잠가두면 그 동리 남편들은 노천에서 밤을 새는가.”277)「내처-아가 봉쇄」, 『조선일보』 1933년 1월 16일자.

앞의 기사들은 모두 남성의 처지에서, 부인이 부부간의 화합을 깨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만큼 여성의 목소리가 커져 있음 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의 인습이 여전히 지배적인 상황에서 남편과 자녀만으로 이루어지는 소가족을 추구하는 것조차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례 없는 세계 공황의 여파로 식민지의 궁핍은 가족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때문에 종래의 부부유별관(夫婦有別觀), 현모양처론은 변천하는 복잡한 현대 사회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며, 여성에게 독립적인 직업 관념을 심어 줌으로써 올바른 부부 관계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연히 나왔다. 그것이 실제로 당시 사회에서 얼마나 실천되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여성 해방의 관점에서 봉건적 가족 제도의 변화와 근대적인 결혼, 부부관이 전망되었다. 그러나 합리적 부부 관계란 전통 사회의 강제혼·조혼·축첩·매매혼 등 각종 폐습이 남아 있는 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현모양처로서 내조에 충실한 것은 생활고에 따른 맞벌이 요구와는 상반되었고, 따라서 여성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즉, 경제난에 빠질수록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여성이 맞벌이를 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는 반면, 남편에 대한 여성의 내조나 가사 노동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심지어 직업여성에 대한 남편의 질투는 맞벌이 아내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 주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278)이애라, 「직업 여성과 남편」, 『신여성』 7권 3호, 1933년 4월, 37∼39쪽. 교사 부인에 대한 질투로 남편이 가출한 사례가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공적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한 예는 1920∼1930년대에 국제 결혼한 부부나 그나마 전문직 부부들로, 경제적 어려움이 없고 직업이나 생활 등에서 서로 이해가 가능한 남녀 사이에서 보이는 흔치 않은 사례였다. 초기의 자유연애·자유결혼이 죽음에 이르는 파경으로 끝나던 것이 1930년대 후반에는 나름대로 부부의 다양하고도 원만한 생활로 점차 안정되어 가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무용가 최승희와 사회주의자 안막, 역사화가 이여성과 성악가 박경희, 조각가 김복진과 교사 허하백, 의사 김여윤과 김원경, 극작가 유치진과 심재순 부부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들은 부부간에 서로를 친구나 동지같이 생각하거나, 현부인(賢婦人)으로 서 여성의 몫을 다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279)『여성』 1권 1호, 1936년 4월, 8∼11쪽. 그 밖에도 행복한 부부로 피아니스트 조은경과 남편 공학박사 최황, 여류 작가 백신애와 리근채, 장덕조와 박명환 등이 소개되었다(『여성』 3권 2호, 1938년 2월, 32∼37쪽). 그러나 이같이 행복한 부부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건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부부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신여성이 구식 현모양처의 길로 뒷걸음질치거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여성은 “내 전생에 무슨 업이 있기에 금생에 계집이 되고 안해가 되옵니까?”280)박순천, 「내가 이상하는 남편」, 『여성』 4권 3호, 1939년 3월, 28쪽. 한 것에 반해, 남성은 “대체로 현재의 남편은 옛날보다 생활 자료 얻기에 몇 십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고, 여성은 몇 십 분지 일의 노력만 하여도 된다는 것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70년 전에 태어나기만 해도 남자 된 덕분에 호강도 했으려니 생각도 난다.”281)송석하, 「세상의 안해여 남편을 이해하라」, 『여성』 4권 3호, 1939년 3월, 84쪽.는 투의 끊임없는 생색과 투정을 하였다.

1940년대에 이르러 ‘부부도(夫婦道)’의 신질서는 ‘오직 신뢰하고 이해하는 것뿐’이라며, “부부간의 불일치, 한 걸음 나아가서 이해의 상반은 결국 분리 작용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한 걸음만 나서면, 벼락낭(절벽 또는 낭떠러지)이 있는 것을 모르고 최후의 발악하는 여자를 볼 때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고 하여 여성을 적극 비난하였다. 아니면 맞벌이 부부가 겪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남자는 안해의, 안해로서의 태도를 요구하게 되므로 해서 피곤한 안해에게 대한 불만이 늘게 됩니다.”라며 끝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임무를 강조함으로써 여성을 압박하였던 것이다.282)함대훈, 「부부도의 신질서」, 『여성』 5권 8호, 1940년 8월, 8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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