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
  • 신라
  • 견당 유학생
이병희

640년(선덕왕 9)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유학생을 빈번하게 파견한 것은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재개된 703년(성덕왕 2) 이후였다. 정권에서 소외된 불만 귀족층이나 몰락 귀족층 또는 6두품이 활로를 모색하려고 적극적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꾀하였다.

신라는 당에 조공한 이래 항상 왕자를 숙위(宿衛)로 파견하였고, 또 학생을 태학에 입학시켜 학업을 닦게 하였는바, 그 기간은 10년이었다. 그 외 학생으로서 그곳에 입학한 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책 살 돈은 본국(신라)에서 지급하였으며 그 외 책값이나 숙식비는 당의 홍려시(鴻臚寺)에서 공급하였으므로 유학생의 수가 끊이지 않았다.9)『동사강목(東史綱目)』 권5 상, 진성여왕 기유 3년.

신라에서는 통상 사신과 함께 3∼16명의 학생을 보냈고, 이들은 간단한 시험을 거쳐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당나라로 건너간 유학생 가운데는 진골도 있었지만 대체로 6두품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하대에는 특히 6두품이 두드러졌다.

신라 하대에 견당 유학생(遣唐留學生)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837년(희강왕 2) 3월 당시 당나라의 국학에서 수학 중인 학생이 21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당나라에 있으면서 귀국하지 않자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당나라 문종(文宗)은 840년(문성왕 2)에 칙명(勅命)으로 수학 연한이 10년을 넘긴 숙위 학생 105명을 집단 귀국시켰다. 견당 유학생으로서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은 58명이나 되었다.10)신형식, 「숙위학생고」, 『역사 교육』 11·12합집, 1969 ; 김세윤, 「신라 하대의 도당 유학생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37, 1982 ; 이기동, 「신라 하대 빈공급제자(賓貢及第者)의 출현과 나당(羅唐) 문화의 교관(交驩)」, 『신라 골품제 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 신형식, 『신라 통사』, 주류성, 2004 , 514∼531쪽.

신라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근시 기구(近侍機構)를 확장하면서 유학생 가운데 일부를 발탁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서서원(瑞書院, 뒤의 한림대), 숭 문대(崇文臺)에 등용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학생은 귀국 후 정부의 차별 대우나 불우한 처지에 불만을 품거나 상심하여 세상을 버리고 산속에 은둔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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