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학생의 신분, 입학 자격
이병희

고려 초 성종 때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향공(鄕貢)과 연계된 지 방 호족의 자제가 중심이었다. 그 후 향공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향리나 백성의 자제도 입학이 허용되었으며, 가세(家勢)가 어렵고 하찮은 자도 능력에 따라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향공으로 선발되는 대상자는 지방 향리의 자제가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향공이 경쟁을 통해 선발되는 상황에서 일반 백성의 자제가 향공으로 선발되어 개경(開京)에 있는 학교로 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지방관으로 가서 근무하다가 인재를 찾으면 개경으로 돌아올 때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주좌(李周佐)는 좌복야(左僕射) 이성공(李成功)이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있을 때 한눈에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개경에 데리고 와서 국자감에 소속시켜 공부하게 한 경우이다. 그는 물론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26)『고려사』 권94, 열전7, 이주좌. 드문 일이지만 지방에서 유능한 인재를 발견했을 때 발탁하여 중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1024년(현종 15)에 향공의 정원이 조정되었다. 이것은 각 지방의 향공 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러 주현 가운데 1,000정(丁) 이상인 고을은 세공(歲貢) 3명, 500정 이상인 고을은 2명, 500정 이하인 고을은 1명 기준으로 계수관(界首官)이 시험을 통해 선발하여 국자감에 보냈다. 이때 계수관은 제술업(製述業)의 경우 오언육운시(五言六韻詩) 한 수를 시험 보았고, 명경은 오경에서 각각 한 문제씩 시험 보았다. 비교적 간단한 계수관의 시험을 통과한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국자감에서 시험을 보았다. 그렇지만 성적이 되지 않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군현의 수를 고려하면 각 지방에서 개경으로 보낸 향공의 수는 1,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시험 보아 자격이 없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국자감에서 다시 공부하게 하였다. 종전에 향공으로 보내는 수가 군현마다 일정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일정한 기준을 설정하여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시험도 비교적 간단한 절차로 치르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간단한 시험에 통과하여 개경으 로 보내지는 인물은 당연히 향리의 자제가 중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군현마다 3명 이내를 선발하는데 일반 백성의 자제가 선발될 여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덕종 때 국자감시(國子監試)가 실시됨으로써 국자감 입학은 더욱 힘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향공을 선발하여 보냈다 하더라도 국자감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출신지로 되돌려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국자감의 입학 자격이 까다로워진 것은 국자감을 선호하는 층이 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048년(문종 2)에 각 주나 현의 부호장(副戶長) 이상의 손자나 부호장 이상의 아들로서 제술업이나 명경업에 응시하려는 자는 소속 고을에서 시험을 보아 개경으로 뽑아 올리게 하였다.27)『고려사』 권73, 지27, 선거2, 과목1, 문종 2년 10월. 이것은 국자감에 소속시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국자감이 위축되는 시점에서 국자감의 학생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취한 조치로 보인다.

국자감 입학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지방에서 계수관이 보는 시험에 합격한 향공이 입학하였다. 그러다 점차 국자감시에 합격하는 것이 자격 요건으로 작용하였다. 품관(品官) 이상 자제의 입학도 허용되었을 것이다. 품관은 대개 개경에 거처하는 수가 많아 그 자제도 개경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으려 한다면 국자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숙종 때까지는 향리의 자제가 학생의 주류를 이루고 입학도 수월하였다. 예종이 7재를 설립한 후에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야만 입학이 허용되었고, 교육 개혁에 따라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3년 동안 국자감에서 의무적으로 수학하여야 하였으므로, 사학에서 수학한 이들도 국자감에 입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인종·의종 때에는 귀족의 자제도 다투어 입학함으로써 국자감의 위상이 높아졌다.28)이중효, 「고려 인종대 국자감 운영을 둘러싼 정치 세력들의 입장」, 『진단학보』 92, 2001.

예종 이후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여야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었음을 보 여주는 예가 많다. 유공권(柳公權)은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후 태학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김존중(金存中)은 남성시(南省試)에 올라 태학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오천유(吳闡猷)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국자감에서 수학하였다.29)김용선 편저, 「유공권 묘지명(柳公權墓誌銘)」·「김존중(金存中) 묘지명」·「오천유(吳闡猷) 묘지명」, 『고려 묘지명 집성』, 2001. 성균시, 남성시, 사마시는 모두 국자감 입학 자격을 검증하는 시험으로 보인다.

인종 때 학식에 따르면, 입학 무자격자(국자학·태학·사문학)는 잡로(雜路)에 관계되는 자와 공(工)·상(商)·악(樂) 등 천업 종사자의 자손, 대·소공친(大小功親)을 범하여 결혼한 자와 가도(家道)가 바르지 못한 자의 자손, 악역을 저지르고 귀향한 자의 자손, 천·향·부곡인의 자손, 자신이 사죄를 저지른 자 등이었다.

공민왕 때 이색은 상소에서, “지방의 향교나 중앙의 학당에서는 재질을 살펴 12도에 진급시키고, 12도에서는 다시 이들을 모아 시험하여 성균관에 진급시키도록 하소서.”30)『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공민왕 원년 4월. 라고 하였다. 12도를 거친 뒤 성균관에 입학하게 하는 내용이다. 사학을 거친 후 성균관에 입학시키려는 것은 사학을 정식의 제도권에 편입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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