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수학 내용과 연한
이병희

예종 때 국자감의 교육을 크게 강화하면서 교육 내용에서도 강조하는 점이 종전의 시부(詩賦) 중심의 교육 내용에서 경의(經義)를 중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종래의 학교 교육은 과거와 연계되어 시부가 중시되었으나 경학을 좀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은 국자감의 유학 6재에 표현되었다. 경전을 학습하는 과목에 따라 반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인종 때 정한 학식에 따르면, 『논어』와 『효경』은 모두 공부하였고, 『상서』, 『공양전』, 『곡량전』 가운데 하나, 『주역』, 『모시』, 『주례』, 『의례』 가운데 하나, 『예기』, 『좌전』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이수하도록 규정하였다. 『논어』와 『효경』을 통해서 효와 충을 근간으로 하고 인을 위주로 한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습득하며, 가정과 사회·국가에 공헌하는 기본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상서(서경)』는 사관(史官)이나 사신(史臣)이 기록한 중국 상고의 역사를 공자가 편찬한 것이며, 『공양(춘추공양전)』은 공자가 지은 『춘추』란 역사책에 대해 공양고(公羊高)가 해설을 하고 주석(註釋)을 붙인 책이다. 『곡량(춘추곡량전)』은 곡량적(穀梁赤)이 『춘추』에 대해 주석을 하고 해설한 책이다. 『상서』, 『공양』, 『곡량』을 배움으로써 학생들은 제왕으로서의 책무와 역사 앞에서 엄숙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주역』은 음과 양의 변화와 소장(消長)에 따라서 우주의 원리와 만물의 변화를 알 수 있도록 한 책이며, 『모시』는 노나라 사람 모형(毛亨)이 『시경』에 주석을 가한 책이고, 『주례(周禮)』는 주대의 관제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이며, 『의례(儀禮)』는 길례(吉禮)·상례(喪禮)·제례(祭禮)·관례(冠禮)·혼례(婚禮) 등의 절차와 예법을 적어 놓은 생활 의식에 관한 책이다. 『주역』, 『모시』, 『주례』를 통해서는 우주 만물의 원리와 정치적 질서 의식, 예의범절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하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예기』는 예 일반에 대한 이론과 의례에 대해 해설한 책이며, 『좌전(춘추좌씨전)』은 노나라 사람 좌구명(左丘明)이 『춘추』를 보충 해설한 책이다. 『예기』와 『좌전』을 배움으로써 정치적·사회적인 예의범절과 역사적인 사명 그리고 책임감을 견지할 수 있었다.31)박용운 외, 『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 3, 신서원, 2003, 39∼40쪽. 때때로 역사서와 시정(施政)을 건의하는 글인 시무책, 자서(字書)인 『설문(說文)』, 『자림(字林)』 등을 익혔다.

기술학(記述學) 영역에서 율학은 율령(律令)을 공부하였고, 서학(書學)은 고문(古文)·대전(大篆)·소전(小篆)·예서(隷書) 등의 팔서(八書)를 공부하였으며, 산학은 산술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이들 기술학은 고려 사회에서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국자감에서 경학을 강조해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지만, 제술업에서 시부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문장 수업이 중시되었다. 또 과거 시험의 문 장 작성에 신경을 쓰다 보면 오히려 좋은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이규보(李奎報)는 “세상의 글을 배우는 자들이 처음에 과문(科文)을 익히느라 미처 풍월을 읊을 겨를이 없다가 급제한 뒤에야 시를 배우게 되는데.”32)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6, 「답전이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 라고 지적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문호(文豪)들의 시문을 박람(博覽)하지 못하고 공부의 주안점이 과거 답안 작성을 익히는 과문체(科文體)의 모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하면서 공부하는 내용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종전에는 시부와 유학의 고전을 주로 공부하였으나, 이제는 주자(朱子)가 정리한 경전(經傳)을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또한, 성리학이 수용됨으로써 명경학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 10학을 설치하면서 성균관에서 기술학(율학, 서학, 산학)을 떼어내고 유학만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국자감에서는 유학만을 공부했고 기술학은 다른 부서에서 교육하였다. 이것은 유학을 공부한 사람과 기술학을 공부한 사람의 신분적 차이가 뚜렷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수업 연한은 유학 9년, 율학 6년이었으나 수학의 최고 목표는 과거 급제였기 때문에 입학 후 과거 급제까지가 재학 기간이었다. 1063년(문종 17) 8월에 국자감 재학 연한이 유생 9년, 율생 6년이 되어도 어리석어 효과가 없는 자는 모두 퇴학시켰다. 가장 오래 수학할 수 있는 기간을 9년으로 한 것이다. 어리석지 않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때는 9년보다 더 길게 국자감의 학생으로 있었다.

국자감에서는 통상 3년 동안 수학하였다. 1110년(예종 5) 국자감의 기능을 강화하려고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국자감에서 3년 동안 공부하게 하였다.33)『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1, 예종 5년 9월. 아무리 공부가 진척된 자라도 국자감에서 3년 동안 수학하여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년은 다른 기관에서 공부한 것을 전제로 한 경우이다. 특히, 사학에서 공부하여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경우에 적용되는 연한이라고 할 수 있다. 국자감에서 처음 공부하는 이들에게 3년은 너 무 짧았다.

국자감에서는 최단 3년, 최장 9년으로 수학 기간이 정해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기간은 개인별로 차이가 컸다. 호진경(胡晋卿)은 국자감에서 6년 동안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문탁(李文鐸)은 국자감에서 8년 동안 수학한 뒤 급제하였고, 유공권은 국자감에서 4년 정도 공부한 뒤 급제하였으며, 오천유도 유공권과 비슷한 5년 동안 국자감에서 공부한 뒤 급제하였다. 대개 4∼5년 정도 수학하다가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많았으나, 1∼2년 동안 공부한 뒤 급제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윤종창(尹宗諹)은 1년, 민지(閔漬)는 2년, 이언충(李彦冲)은 2년 동안 수학한 뒤 과거에 급제하였다.34)김용선 편저, 「호진경(胡晋卿) 묘지명」·「이문탁(李文鐸) 묘지명」·「유공권 묘지명」·「오천유 묘지명」·「윤종창(尹宗諹) 묘지명」·「민지(閔漬) 묘지명」·「이언충(李彦충) 묘지명」, 『고려 묘지명 집성』, 2001. 국자감 재학 후 2년 만에 급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대개 5년 이상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과거에 급제하면 국자감에서 하는 공부는 끝나는데, 과거 시험 합격이 목표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 때 정한 학식에 따르면 이수할 과목과 수학 연한은 다음과 같다. 『논어』, 『효경』 모두 1년, 『상서』, 『공양전』, 『곡량전』 각각 1년 반, 『주역』, 『모시』, 『주례』, 『의례』 각각 2년, 『예기』, 『좌전』 각각 3년으로 모두 7년 반이 걸렸다. 학식에 규정된 각 경서의 이수 기간은 경서를 이수하기 위한 최장 기간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학업 성적이 뛰어난 자는 수학 능력에 따라 정해진 경서를 이수하고 바로 다음 경서로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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