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국자감
  • 학생의 성적 평가, 공부하는 모습
이병희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학업 성취에 대하여는 당연히 평가가 뒤따랐다. 평가가 따르지 않는 교육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매달 학생의 공부 정도를 평가하였는데 이를 월서(月書)라고 하였다. 그리고 계고(季考)라고 하여 계절마다 하는 평가도 있었다. 계고는 계춘(季春, 3월)·계하(季夏, 6월)·계추(季秋, 9월)·계동(季冬, 12월) 네 계절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산출된 성적을 행예분수(行藝分數)라 하였다.35)박용운 외, 앞의 책, 2003, 43쪽. 이공승(李公升)은 국자감에서 달 마다 보는 시험과 철마다 치르는 시험에서 동학들에게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유공권도 월서와 계고에서 매번 우등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36)김용선 편저, 「이공승(李公升) 묘지명」·「유공권(柳公權) 묘지명」, 『고려 묘지명 집성』, 2001. 이공승과 유공권은 12세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12세기에는 월서와 계고가 엄격하게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받은 점수가 일정한 수준에 달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평가하여 유능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빠른 시간 안에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행예분수에 따라 과거에 나아가는 단계가 달랐다. 1136년(인종 14)의 기록에 보면 “국학의 여러 학생은 행예분수가 14분 이상이면 직접 제3장에 나아가고, 13분 이하 4분 이상은 시부장에 나아간다.”라고37)『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1, 인종 14년 8월. 되어 있다. 국자감 학생의 성적이 14분 이상이 되면 초장과 중장을 생략하고 바로 종장, 즉 제3장에 나아가 시험 볼 수 있는 특전을 준 것이다. 4분 이상 13분 이하면 중장, 즉 제2장부터 시험을 치러야 했고 성적이 그 이하인 자는 물론 처음부터 치러야 하였다.

국자감의 학생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기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국자감이 정식으로 설치되기 전인 986년(성종 5)경 260명이 개경에서 수학한 예가 보인다. 예종 때 국자감 중흥 정책으로 국자감 수학생 수는 200명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119년(예종 14) 7월에는 유학에 60명, 무학에 17명을 두도록 한 일이 있다.

인종 때 학식을 제정하였는데, 국자학·태학·사문학은 각각 300명으로 정해져 있어 모두 900명에 이른다. 그러나 900명은 당시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감당할 수 없는 숫자로 보인다. 관학이 가장 융성하였던 인종 때의 학생 수가 한때 200여 명 정도였고, 그 전기나 후기에는 대체로 100명 미만이었다. 잡학인 율학은 40명 내외, 서학과 산학은 각각 15명 내외로 추정된다.

1367년(공민왕 16) 이전에는 국자감의 정원이 100명도 되지 못하다가 이때에 와서 100명으로 확정되었는데, 이것은 이후 고려 사회에 정착되어 조선 초까지 계승되었다.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인종 때 모습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즉, 국학 6재 학생들이 각기 공부하는 대·소경을 가지고 강당에 올라가면, 박사와 학유(學諭)가 경전을 가지고 올라갔다고 한다. 학생은 하루에 5명을 넘지 말아야 하고, 질문도 한 사람당 두 가지 이상 못하게 하며, 조용히 논란하여 의심을 깨우치고 의혹을 풀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38)『고려사』 권74, 지 28, 선거 2, 학교 2, 인종 15년 9월. 조용한 가운데 의문을 풀어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국자감에 다니는 학생의 수준이 모두 비슷한 것은 아니었다. 우열의 차가 적지 않아, 우수한 학생은 서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 때 이문탁이 국자감에 다닐 때 학생들이 모두 그의 명망에 경복(敬服)하여 모든 논의에서 감히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춘추좌씨전』에 밝고 깊어 많은 학생 가운데에서 여러 차례 으뜸을 차지하였다.39)김용선 편저, 「이문탁 묘지명」, 『고려 묘지명 집성』, 2001.

1369년(공민왕 18)의 모습을 보면, 교관(敎官)이 새벽에 일어나 관문으로 들어와 마루에 오르면 학생들은 차례차례 마당의 동서에 늘어서서 두 손을 모아 잡고 허리를 굽혀 예를 다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각기 공부하는 경전을 가지고 전후좌우로 담처럼 둘러서 나가 교관을 둘러쌌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도 논란하는 데 절충하여 합의에 도달해야 수업을 끝냈다. 이렇게 책 읽는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40)이숭인(李崇仁), 『도은집(陶隱集)』 권4, 「증이생서(贈李生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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