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사학
  • 사학과 국자감의 관계
이병희

사학과 국자감은 대체로 동급의 교육 기관으로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최충의 사학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063년(문종 17)에 국자감은 이미 폐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1102년(숙종 7)에는 당시 재상 소태보가 국학폐치론(國學廢置論)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이 설립되어 활성화됨에 따라 국자감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사학 12도는 단순한 사학이 아니라 과거와 직접 연결되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학제였다. 사학에서만 수학해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가능하였고, 나아가 사학에서 수학하는 것이 과거에 더 유리하였기 때문에 국자감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개경의 학생들은 대부분 사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국자감에서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지방 학생은 사학에 거처하는 것보다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것이 좀 더 편하였다.

예종 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3년 동안 국자감에서 수학하는 것을 의무로 함에 따라 사학은 불리해졌다. 물론 사학에서 공부한 뒤에 다시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어차피 국자감에서 공부하여야 한다면 굳이 사학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국자감에서 공 부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아무튼 예종 때 실시한 이 개혁으로 사학은 국자감과 대등한 관계에서 국자감의 하위 교육 기관으로 강등(降等)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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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후 사학은 다시 동급의 기관으로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사학에서 수학한 후 과거 시험에 합격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1352년(공민왕 원년)에 이색은 상소를 올려 향교와 동서 학당(東西學堂) 학생을 12도에 올려 보내고 12도에서 다시 성균관에 올려 보내자고 하였다. 사학 12도를 제도권 안에 완전히 편입시키고 그 위상을 국자감 아래에 두자는 것이다.

사학 12도는 개인이 세운 것이었지만, 국왕들은 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1143년(인종 21) 4월에 국왕이 관심을 가지고 학관을 보내 강습시켰고, 1285년(충렬왕 11)에는 국왕이 산사에 행차하여 9재의 하과를 시찰하였다. 이때 재생이 가요를 올리니 국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하였다.57)『고려사』 권30, 세가30, 충렬왕 11년 6월. 국왕이 9재의 하과에 관심을 가지고 시찰하였으며 아울러 술과 과일을 내린 것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사학은 성균관·동서 학당·향교와 더불어 학전과 노비를 지급 받고 있었다. 아마 이전부터 이것이 제도화되어 국가에서 일정한 재정을 지원받으면서 운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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