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향교
  • 공부하는 내용과 모습
이병희

향교는 교학적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술과 명경을 주축으로 하는 과업 준비 교육도 중요시하였다. 이에 과거 과목과 관련이 있는 시(詩)·부(賦)·송(頌)·책(策)과 경의(經義) 등이 중시되었다. 성리학이 전래된 고려 후기에는 『육경의(六經義)』와 『사서의(四書疑)』를 중요시하였다.

구체적인 공부 내용은 강화부 향교에서 엿볼 수 있다. 고려 말에 심덕부(沈德符)가 강화 부윤(江華府尹)에 부임한 뒤 학사(學舍)를 크게 건축하고 사유(師儒)를 맞이하여 고을 자제들을 모아 시서(詩書)와 예의(禮義)를 가르쳐 매우 융성하였다고 한다.63)『동문선(東文選)』 권117, 「특진보국숭록대부청성백심공덕부행장(特進輔國崇祿大夫靑城伯沈公德符行狀)」. 시서와 예의 같은 기초적인 공부를 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 시기는 신유학이 전래된 시기로서 성리학과 관련한 공부가 중요하였을 것이다.

향교 학생들은 유명한 문인이 오면 잘 대접하고 배움을 청하였던 것 같다. 황려 향교(黃驪鄕校)의 학생들이 이규보를 위하여 달밤에 배를 강에 띄우며 놀다가 5경(五更)에 이르러 파하였다고 한다. 1247년(고종 34) 봄에 최 자(崔滋)가 왕명을 받아 상주를 순찰했는데 목사에서부터 향교의 모든 유생에 이르기까지 시가(詩歌)를 올리며 환영했다고 전한다.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생생한 모습은 고려 말 여러 지방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세기 초 강릉의 향교를 새로이 완성하고서 동몽(童蒙)을 가르치는데, 먼저 형편에 따라 각기 학업을 닦게 하니 재주 있는 많은 아이들이 떼지어 장유의 차례를 지키는 모습이 볼 만하였다고 한다.

14세기 전반기 김해 향교에는 학사의 동쪽에 작은 정자가 하나 있어 하과 때마다 빈객이 오면 학생들은 그 아래에 앉아 각촉부시를 하는데 간혹 혹서기(酷暑期)이거나 비를 만나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모두 고통스럽게 여겼다고 한다.64)이곡, 『가정집』 권2, 「김해향교수헌기(金海鄕校水軒記)」. 하과 때에는 정자를 이용하였고 하과를 할 때 빈객이 올 경우 학생들이 각촉부시를 하여 평가받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 전반기 예주 향교에서는 재생 중 조금 나은 자를 뽑아 가르치게 하고 장서기 이천년이 하루 한 번씩 가서 근만(勤慢)을 고찰 권징(勸懲)하니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이 서로 가르치고 군현의 관리가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살핀 것이다.

정운경은 나이 겨우 10여 세에 학업에 분발하여 영주(榮州) 향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복주목(福州牧) 향교에 진학하였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가볍게 여겼으나 과(課) 때마다 1등을 하니 온 고을이 모두 큰 그릇으로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65)정도전(鄭道傳), 『삼봉집(三峰集)』 권4, 「정운경행장(鄭云敬行狀)」. 이로써 일정한 평가가 있어 상호간의 우열을 확인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흥부향교기(永興府鄕校記)」에 따르면, 김렴(金廉) 등 60여 명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쳤다고 한다. 향교의 학생이 60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향교에 공부할 공간이 없을 경우 절을 빌려서 가르치는 수도 적지 않았다. 연안(延安) 향교의 경우에는 1391년에 정달몽(鄭達蒙)이 연안부의 교수관(敎授官)이 되어 와 보니 거처할 곳이 없어 절을 빌려 동몽을 모아 가르치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66)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권12, 「연안부향교기(延安府鄕校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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