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향교
  • 학관과 시설
이병희

향교의 학관도 기본적으로 유교적 교양이 풍부하고 시문을 능통하게 작성하였다. 987년(성종 6) 8월 전년에 고향으로 돌려보낸 학생들에게 가르칠 스승이 없으므로 경서에 능통하고 문적(文籍)을 많이 본 사람을 경학박사, 의학박사로 삼아 12목에 각각 한 명씩 파견하여 열성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1105년(예종 즉위년)에 3경 8목의 통판(通判) 이상과 지주사(知州事)와 현령(縣令)으로 문과 출신자를 겸하여 학사(學事)를 관리하라고 하였다. 이 학사는 학교에 관한 것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문과 출신 수령에게 그 일을 맡게 한 것이다.

지방 교육은 장서기나 사록(司錄) 같은 속관(屬官)도 일정하게 담당하였을 것이다. 지방관은 과거에 급제한 유학자가 많았기 때문에 지방의 자제를 교육할 학식을 갖추고 있었다.

지방관이 향교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무인 정권 이전에는 대체로 넓은 고을인 3경·대도호부·목 등지에는 문사(文士)를 파견하여 학문을 하게 하였으며, 방어진·주·군 같은 좁은 고을에는 문학(文學)을 두어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학관은 고을의 격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원나라 간섭 이후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넓은 고을인 경·목·부 등에는 교수를, 좁은 고을인 군·현에는 훈도(訓導)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앙에서 교수를 파견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수령이 공무 중간중간 직접 가르치거나 승려나 유사를 초빙해 오는 실정이었다. 14세기 초에 강릉에서는 향교를 새로이 완성하고서 여러 고을의 관동(冠童)들을 불러 모으고, 승려인 구암장로(龜庵長老)를 맞이하여 동몽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고려 말에 심덕부가 강화 부윤에 부임한 뒤 학사(學舍)를 크게 건축하고 사유를 맞이하여 가르침을 담당하게 하였다. 14세기 전반기 예주(禮州) 향교는 학생 가운데 조금 나은 자를 뽑아 가르치게 하고 장서기 이천년이 하루 에 한 번씩 가서 감독하였다. 학생들이 서로 가르치고 군현의 관리가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살핀 것이다. 학생 가운데 다소 앞선 이가 뒤진 학생을 가르치고 지방관이 하루에 한 번씩 살폈다. 이로써 향교에서 학생에게 배움을 베푼 이가 승려, 사유, 동료 학생 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향교의 시설로서 초기에는 독립된 대성전도 없어서 한 건물 안에서 공자를 모시면서 강학을 하는 형편이었다. 몽고 간섭 이후 대성전이 독립되면서 봉사(奉祀)하는 선현(先賢)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강릉에서는 향교를 새로이 지으면서 향교 내에 문묘(文廟)를 세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봉사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우러러보면서 감화를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향교에서 문묘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 전반기에 이곡이 예주 향교를 언급하면서, 우리나라 향교의 제도는 사당(祠堂)과 학사(學舍)가 한 건물에 있어 무례하다고 하였다. 새로이 향교를 지었는데 대성전의 중앙에는 공자의 상을 걸고, 좌우의 낭무(廊廡)는 동몽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 신진 사대부가 향교를 세울 적에는 모두 대성전이나 문묘를 세워 공자와 선현을 봉사하였다.

제천(堤川) 향교의 구체적인 건물 배치가 전하고 있다. 대성전에서는 선성의 신주를 봉안하였으며, 동서에 행랑 각각 4칸씩을 세워 재생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고, 그 남쪽에 대문 한 칸을 세웠으며, 대문 곁에 또 부엌 4칸을 세우고 거기에 온돌을 놓아 교관이 휴식하는 곳으로 하였다고 한다.67)권근, 『양촌집』 권12, 「제주향교기(堤州鄕校記)」. 여기에서 향교에는 대성전, 행랑, 대문, 부엌 그리고 학관 휴식처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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