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성균관
  • 학생의 성별, 연령, 신분
  • 성균관 학생의 특권
이승준

조선은 성균관을 통하여 성리학적 정치 이념을 내면화한 인재를 양성하여 관료로 등용하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균관 유생은 예비 관료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던 양성지(梁誠之)는 유생이 학교에 입학하여 함께 공부하면 다음과 같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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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방방(咸興放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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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스승과 벗을 얻어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를 친하고 가깝게 하여 그 기질을 본받는 것이 둘이며, 인심과 풍속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요, 직접 문헌의 아름다움과 예악(禮樂) 명물(名物)을 보고 습속의 나쁜 점을 고침이 넷이요, 고전을 얻어 공 부함으로써 부족한 부분을 보충함이 다섯이요, 중국의 어음(語音)을 배움으로써 번역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81)『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정유.

유생들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함께 공부함으로써 좋은 스승과 벗을 만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으며, 구하기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고, 어려운 내용은 직접 질문하여 답을 얻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생원·진사나 유생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으로 성균관 유생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고, 따라서 과거에 합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성균관 유생이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식년시(式年試)를 제외하고 특별히 응시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은 관시, 알성시, 절제, 황감제 등이 있었다. 관시(館試)는 성균관 유생이 응시할 수 있는 문과 초시였는데, 성균관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인 유생만 응시할 수 있었다. 관시에서는 50명을 뽑았는데 규정된 원점을 모두 채운 유생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합격률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공기(孔頎)에 관한 일화는 관시가 다른 과거 시험보다 수월하였음을 보여 준다. 공기란 자가 관시에 응시하였는데, 마침 51명밖에 응시하지 않아 1명만 떨어지게 되었다. 공기는 자기의 재주만 믿고 초장(初場)에서는 글을 짓지 않고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어찌 내가 떨어지겠느냐.”고 큰소리쳤다. 중장(中場)에서도 술만 마시며 글을 짓지 않고 나오며 말하기를 “종장(終場)이 있지 않느냐.”고 하였다. 종장이 되자 50명이 서로 약속을 하고 술과 음식을 공기에게 권하였다. 공기는 크게 취해 종일 드러누워 잠만 잤다. 결국 50명은 합격하였으나 공기 혼자만이 떨어졌다.82)장재천, 『조선조 성균관 교육과 유생 문화』, 아세아문화사, 2000, 270∼271쪽.

알성시(謁聖試)는 국왕이 친히 성균관 문묘에 행차하여 배향을 한 후에 실시하는 시험이었다. 성균관 유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묘가 성균관에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유생은 응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알성시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정하였기 때문에 유생이 선호하는 과거 시험이었다. 절제(節製)는 매년 정월 7일에 실시하는 인일제(人日製), 3월 3일의 삼일제(三日製), 7월 7일의 칠일제(七日製), 9월 9일의 구일제(九日製) 등이 있었다. 절제는 간혹 사학의 유생도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나, 대부분 일정한 원점을 얻은 성균관 유생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절제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으면 문과 초시를 거치지 않고 회시(會試)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황감제(黃柑製)는 제주 목사가 12월에 국왕에게 진상하는 감귤을 일부 성균관에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실시하는 과거로서 1641년(인조 19)에 처음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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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친림강론도(成均館親臨講論圖)
성균관친림강론도(成均館親臨講論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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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는 유생이 성균관에 거주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하여 때때로 도기과(到記科)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즉, 관학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국왕이 불시에 식당 도기(到記)에 이름이 적혀 있는 유생을 대상으로 강경(講經)이나 제술(製述)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유생 몇 명에게 문과 회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주기도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봄과 가을에 도기과를 실시하였으며, 제술과 강경을 시험하여 한 사람씩 뽑아서 급제와 같은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매년 봄가을로 도기과를 설치하는데, 그 시기에 앞서 승지(承旨)를 성균관에 들어가게 하여 아침 도기나 저녁 도기를 거둔다. 제술과 강경을 시험하여 한 사람씩 뽑아서 급제와 같은 자격을 준다. …… 도기과가 실시된다고 하면 식당에는 생원·진사들이 서로 밀치고 막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쓰려는 붓과 종이를 빼앗으니 키가 작고 힘이 약한 자는 물러서서 기다린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탄식한다.83)윤기, 이민홍 옮김, 『조선조 성균관의 교원과 태학생의 생활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9, 141∼142쪽.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성균관 유생에게는 특별히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것을 성균관 천거(薦擧)라고 하였는데, 50세 이상 된 자로서 학문과 품행이 우수하고 일고(日考), 월고(月考)의 성적이 우수한 자 또는 50세 이상이면서 문과 초시에 일곱 번 합격한 자가 대상이 되었다. 대개 1년에 3명 정도를 추천하게 하였으나 50세가 넘도록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이 거의 없었으며, 천거에 따른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성균관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관학이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유생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데 필요한 문구와 식사,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 등을 모두 국가에서 제공받았다. 그리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군역(軍役)과 잡역(雜役)을 면제받는 특권도 있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자치 조직을 구성하여 학교생활을 자신이 운영할 수 있는 자치권이 있었다. 유생들은 그들의 자치 조직과 자치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모아 현실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성균관 유생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한 이유는 유생의 학업 성취 의욕을 높임으로써 성리학적 지배 이념을 내면화한 관료를 기르려 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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