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4장 일제강점기의 배움과 가르침
  • 3. 학교 생활
  • 수업 외 활동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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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과 운동회 광경
소풍과 운동회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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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에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다양한 상징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봉안전(奉安殿)189)교육 칙어 등본과 천황의 사진을 비치한 사당으로 학교마다 설치되어 있었다.과 그 안에 보관되어 있는 교육 칙어(勅語) 등본, 어진영(御眞影),190)천황의 사진. 가미다나191)이른바 일본 시조라고 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모셨다는 10㎝×4㎝×30㎝ 크기의 상자였다. 등의 상징물, 교정 게양대 위에 걸려 있는 히노마루, 교실의 벽마다 걸려 있는 일본 제국주의 관련자들의 초상화와 각종 칙어 등이 있었다. 보통학교 학생들의 학교 생활은 이들 상징물에 대 한 경례로 시작하여 경례로 끝났다. 특히, 교육 칙어는 1911년 10월 일본 천황이 조선 총독에게 하부(下付)하는 방식으로 조선에 들어와서, 식민 교육 전반의 최고 이념이 되었다. 총독부는 1912년 교육 칙어 등본을 관·공·사립학교에 배우게 하는 한편, 훈령 1호를 통해 각종 기념일에 그것을 낭송하도록 법제화하였다.

그 외에도 춘계 운동회와 추계 운동회, 원족(소풍), 학예회, 수학여행 등이 있었다. 원족은 봄가을 두 번 실시되었는데, 봄에는 고학년들이 수학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저학년만 가고, 가을에는 전교생이 모두 참여하였다. 장소는 주로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교외로 떠났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원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울의 한 고등 보통학교는 원족 대신 학교 야산에서 토끼잡이를 실시하여 점심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학여행은 동화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수학여행의 목적을 “내지 또는 만주로 여행하여 국민으로서 자각자중(自覺自重)의 마음을 함양시킨다.”로 명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수학여행은 주로 고등 보통학교 4, 5학년 학생들이 대상이었다. 수학여행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일본과 만주로 정해 놓았고, 수학여행 코스도 대체로 유사하였다. 만주 지역의 경우 주로 일본의 경제력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산업 현장이나 근대적 도시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무시킬 수 있는 전적지가 중심이었다.

일제는 만주 지역을 수학여행 코스로 넣어 학생들에게 점차 커져 가는 일본의 국력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려 하였다. 일본에서는 주로 신사와 궁전을 참배하였다. 일제는 이세다이 신궁(伊勢大神宮), 이츠타 신궁(熱田神宮),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등 황실이나 일본의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신사나 신궁을 참배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황국 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입하려 하였다. 또 번화한 근대 도시인 도쿄 를 관람함으로써 학생들은 일본을 발달된 문명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일본 군사 시설을 관람하여 일본의 군사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는 일본 수학여행을 통해 천황 중심의 일본 역사와 현대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힘을 보여 줌으로써 학생들에게 황국 신민으로서 자부심과 정체성을 각인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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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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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학여행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이 일어나 패싸움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학생들이 자기네 본토에 왔다는 허황된 자만심에서 텃세를 부리기도 하였으며, 생활 풍습에서 오는 차이로 일본인 학생들과 마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식사 때 일본인 학생들은 정좌하고 먹는 데 비해 조선인 학생들은 풍습대로 소탈한 자세로 식사를 했고, 일본인 학생들이 이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여 식사 중에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로 조선인 학생들에게 면박을 주자 패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제의 의도 가 어찌되었든 간에 수학여행은 조선의 학생들에게 이국의 색다른 풍경에 대한 깊은 감회와 정취를 주었으며, 광활한 만주 평야를 대하고 호연지기를 키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수학여행은 중일 전쟁으로 일본군과 군수 물자의 수송으로 철도가 바빠지게 되자 중지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속개되었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중지되었다.

또 정기 주요 행사로는 매월 1일에 열리는 국기 게양식과 학생 대표 조선 신궁 참배가 있었고, 1년에 한 번 10월 16일부터 18일 사이에 전교생이 신사를 참배하였다. 1930년 후반에는 황국 식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학교에서 체력 훈련, 군사 훈련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른바 ‘황국 신민 체조’라는 목검을 이용한 검도 체조와 건국 체조 등이 개발되어 일상적인 정렬 훈련 외에 학생들을 훈련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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