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2. 조선의 상업 정책과 시전 상인
  • 조선의 건국과 시전 상인
이욱

조선시대에 권력의 비호를 받은 상인의 전형은 시전 상인이었다. 전근대시대의 도읍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민간 유통 기구와는 별도로 국가가 계획적으로 조성·운영하는 어용 유통 기구가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이 시전 상인이었다. 고려도 왕실과 지배층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시전을 설치하였다. 조선도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자 조달과 재정 물자의 불하, 한양 도성민의 필수품 따위를 조달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시전을 설치하였다. 자연 경제에 기반한 고려와 조선은 왕경(王京)에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시전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919년(태조 2)에 개성을 수도로 개발할 때부터 시전이 설치되었다. 이 당시 시전의 규모나 운영 방법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12세기 초엽에 개성 시전의 북곽 건물 65칸이 불타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13세기 초엽에는 개성의 광화문(廣化門)에서 십자가(十字街)에 이 르는 도로 좌우변에 1,008영(楹)의 장랑(長廊)을 건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개성의 시전은 장랑 건물로 구조되어 있었고 관부(官府)가 이를 건조하여 시전 상인에게 대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시전 건물을 대여받은 상인은 일정한 공랑세(公廊稅)를 바쳤을 것이다.

개성 시전의 규모를 더욱 상세히 전해 주는 문헌은 역시 12세기 초엽의 기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이다. 이에 따르면 개성의 시전은 광화문에서 부급관(府及館)까지 장랑을 이루고 있으며, 각 상전의 문루에는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遜) 등의 전호를 쓴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전을 감독하는 관서로서 경시서(京市署)가 있어서 항상 물가를 조절하였다. 예를 들면 1282년(충렬왕 8)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경시서로 하여금 농사의 풍흉(豊凶) 정도에 따라서 미곡 가격을 정하게 한 것이나 1381년(우왕 7)에 개성 시내의 물가 등귀를 막기 위하여 경시서로 하여금 물가를 평정하게 한 후 이를 어긴 사람을 처형하게 한 사실 등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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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시서인(平市署印)
평시서인(平市署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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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시대 시전과 관부의 관계로 미루어 보아 이들 시전도 전매 특권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시대의 도시 상업에서도 매점 상업이 성행하였음은 알 수 있다. 1321년(충숙왕 8)의 기록에 따르면 개성 시내에 네 개 염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판매하는 소금을 권세가에서 매점하기 때문에 관부에서 발급하는 표첩을 갖지 않은 자에게는 소금 판매를 금지한 일이 있었다.

이처럼 고려 말에도 개경의 시전은 흥성하였다. 그러므로 이성계 역시 조선을 건국한 다음 시전 담당 기구로 경시서를 설치하고 고려 시전에 기반하여 시전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정비 내용은 의식(衣食)에서 일상 필수품 에 이르는 여러 가지 물품을 대시(大市)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우마(牛馬) 같은 물품도 일정한 장소에서만 거래하게 하는 것이었다. 미곡 같은 것은 거주지에서 매매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대시에는 각 상점의 명칭을 판자에 새기고 그 아래에 판매물의 종류를 그려서 내걸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고려시대 시전 제도의 원형은 유지하되, 전면 재편하여 시전에 대한 국가의 간여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판매 구역의 설정, 판매 물종(物種)의 고정 같은 조치는 이를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그런데 1394년(태조 3) 한양 천도가 결정됨으로써 정부의 시전 정비 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새로운 수도인 한양에서는 시전 건물을 새로 건설해야 하였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의 한양 천도는 시전은 고사하고 궁궐, 관아 등 수도로서의 기본 시설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여론이 많은 상황에서 태조의 정치적 고려가 우선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조 당대에는 개경의 시전 같은 상설 점포로서 행랑(行廊)을 갖춘 시전은 조성되지 못하였다. 당시 이를 대신한 것이 이른바 항시(巷市)였다. 항시는 후대의 장시와 흡사한 형태였다. 아직 상설 점포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교환은 장시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태조 연간 한양의 항시는 성안의 여러 곳에서 개시되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종루가 있던 청운교(靑雲橋, 뒷날 철물교라 불리던 다리로 오늘날 탑골 공원 앞에 있었다) 서쪽에서 열리던 대시였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된 대시를 포함한 여러 항시는 왕자의 난을 거친 이후 조선 정부가 1399년(정종 원년) 3월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황폐해지고 말았다.

한양에 시전이 설치된 것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한양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도읍으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그에 걸맞은 도시 기반을 건설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전 행랑의 건축이었다. 시전 설치는 도읍의 기능을 원활하게 유지하고 거주민을 안착시키기 위한 선결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한양으로 재천도한 다음에 조선 정부는 우선 오랜 왕경으로서 전통과 상업 도시의 면모를 지니고 있던 개경의 상인들에게 한양으로 옮겨오라는 조치를 내렸다. 다음의 자료는 이를 말해 준다.

개성 유후사에서 상언하기를, “개경의 백성들은 공상(工商)이 섞여 살기 때문에 그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도읍을 옮긴 이후로 시사(市肆)를 여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미곡으로 잡물(雜物)을 무역하는 것이 전혀 없고, 부자 상인과 노련한 장사치들이 돈과 곡식을 많이 쌓아 두고 물가를 올리고 내리거나, 뒷거래로 매매를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쌀값이 뛰어오르고 귀하기 때문에, 인구가 날마다 줄어들어 여리(閭里)가 쓸쓸하오니, 중국 사신이 오고가는 데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부자 상인과 큰 장사치로서 옮기려 들지 않는 자만 강제로 한양으로 이사하게 하고, 그 밖에는 각각 시사를 열게 하여 무역을 편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2)『태종실록』 권17, 태종 9년 3월 병오.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에 구도(舊都)인 개경의 시사 활동을 금지한 것은 개경의 격을 떨어뜨리고 궁극적으로는 개경에서 활동하던 시전 상인들을 한양으로 옮겨 신도(新都)의 시전 상업을 조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의도는 쉽게 관철되지 못하였다. 개경에서 시사를 금지한 것이 암거래를 조장하여 쌀값을 앙등시키는 등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그 조치는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또 개경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한양으로 천도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정종 때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그간 한양으로 옮겨와 있던 개경 주민들이 서로 기뻐하며 개경으로 돌아가려는 행렬이 길을 메웠다고 한다.

개경 주민들의 태도가 이렇고 개경 시사 금지에 따른 쌀값 앙등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자, 부상대고(富商大賈)를 제외한 나머지 개경 거주 상인들은 이전처럼 개경에서 시사 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듬해인 1410년(태종 10) 10월에는 개경 상인들이 한양 상인들과 함께 상세(商稅) 부과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 후에도 과거 어용 상업의 전통과 경험이 있던 개경 상인들이 한양으로 쉽게 옮겨 오지 않자 한양의 도시 상업 조성 사업은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 때문에 1410년까지도 한양에서 활동하는 상인들은 주로 운종가(雲從街)에 밀집해 있었고 상거래가 상당히 문란하였다. 이는 한양 상업에 대한 정부의 감독과 실태 파악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1410년 시장의 문란상을 정리하기 위한 첫 조치가 내려졌다. 이는 판매하는 상품별로 구역을 정해 주는 조치였다. 즉, 시전은 장통방 이상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 외에 미곡은 동부의 연화동구, 남부의 훈도방, 서부의 혜정교, 북부의 안국방, 중부의 광통교에서 거래하게 하였다. 우마는 장통방의 하천변에서 거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도성의 일반민들이 생필품을 교환하는 여항 소시(閭巷小市)는 각각 자기 집 앞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치는 한양 내 상가를 판매 물종에 따라 구획한 최초의 체계적인 시가 정비 사업으로, 상설 점포를 전제한 조선 정부의 시전 조성 정책의 기반을 닦은 것이었다. 그리고 1411년(태종 11) 시전 건물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2월에는 혜정교(惠政橋, 오늘날 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동쪽에 있던 다리)에서 창덕궁 동구에 이르는 시가 좌우에 800여 칸의 행랑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고 그해 5월 새로 돈화문을 세운 창덕궁 궐문에서 정선방 동구까지 총 472칸의 행랑이 완성되었다. 이듬해에는 혜정교 동구에서부터 창덕궁 동구 사이의 원래 계획 구간에서 동쪽으로 좀 더 확장된 종묘 앞까지 모두 881칸이 건설되었고, 이어 1414년(태종 14) 에는 종루에서 남대문 그리고 종묘 앞 누문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구간에 모두 667칸의 행랑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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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의 운종가
1890년대의 운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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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1412년 2월부터 시작된 도성의 행랑 건설 공사는 대략 3년여의 공사 기간과 3차에 걸친 시공 끝에 1414년 말경 모두 2,027칸의 행랑을 조성함으로써 완료되었다. 물론 이 건물 전체가 시전으로 활용된 것은 아니었고, 시전 구역은 오늘날의 종로 1∼3가와 남대문로 1가 일대였다.

이렇게 건설된 시전 행랑에는 우선 정부의 이주 정책에 따라 개경에서 옮겨 온 부상대고 등 개경의 시전 상인들이 입주하여 영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수공업자들 또한 입주하여 물품을 제조·판매하였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시전 상인은 별다른 경쟁자 없이 영업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정부에서 부과하는 시역(市役)을 부담하는 대신 관에서 공식적인 영업을 허가받은 상인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매개로 전국의 상업과 상인을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억말(抑末) 정책을 폈기 때문에 시전 상인들은 집중적인 보호와 육성의 대상이었다. 이에 따라 시 전 상인은 도성 안의 상품 유통을 독점할 수 있었다. 시전의 도성 상품 유통 독점은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이들의 상권을 위협할 만한 사상(私商)이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아울러 시역으로 주어지던 정부 수요 물자의 조달 의무 역시 대가가 제대로 지불된다면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는 거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는 미곡이나 공물 가운데 잉여물이 생기면 시전 상인들에게 우선 처분하였는데, 이 역시 많은 이윤을 보장하였다.

시전 상인들의 권력과 유착한 상업 활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 초부터 공물(貢物)의 방납(防納)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대외 무역에서 사신 수행을 빙자한 사무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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