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3. 경강 상인의 성장과 정경 유착
  • 주교사 설치와 쌀 폭동
  • 쌀 폭동과 정경유착
이욱

쌀 폭동은 1833년 3월 한양의 미곡 유통이 경색되면서 일어났다. 1832년은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고,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부에서는 한양 주민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였고, 그 조치는 효과를 보았다. 우려와 달리 한강 연변에 곡물이 많이 반입되어 1833년 2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는 쌀값이 조금 인하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되자 경강 상인은 이익을 많이 얻지 못할까 염려하여 농간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양의 미곡 소매상을 사주하여 곡식을 감추고 팔지 못하게 하였다. 한양의 싸전 상인들도 이에 호응하여 값을 올렸다. 그 결과 2월 20일부터 30일까지는 한 섬의 곡식도 도성 안으로 반입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10여 명의 여객 가운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곡식을 판매할 뿐 나머지 여객들은 거래를 중지하였다. 이러한 일을 계속 반복하자 쌀값이 급등하였다.

3월 6일, 7일에는 이전에 비해 쌀값이 두 배로 올랐다. 그것도 모자라 3월 8일에는 한양의 싸전이 일제히 거래를 중지하고 가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서 매일매일 곡식을 사서 연명하는 이들이 곡식을 구입하지 못하고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상인들이 무역해 놓은 쌀이 한강 연변에 쌓여 있는데도, 미곡 가격은 연초보다 올랐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도 쌀을 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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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싸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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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3월 8일에 싸전이 일제히 문을 닫아 미곡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한양의 미곡 구매자들은 흥분하여 싸전 상인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쌀 폭동이었다. 미곡 구매자들이 ‘쌀값이 급등한 것은 시전 상인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하여 싸전을 부수고 불을 지르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8)『비변사등록』 221책, 순조 33년 3월 9일. 나아가 경강 연변에 미곡을 쌓아 놓은 집들도 불태웠는데, 모두 15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쌀 폭동의 가장 큰 책임은 경강 상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사태 수습 과정을 보면 그렇지 못했다. 비변사에서는 쌀 폭동의 주동자였던 호위군관 김광헌(金光憲)을 비롯한 7명을 효수형에 처하였다. 그 밖에도 39명을 종범(從犯)으로 처벌하였다. 그런데 정작 사태를 초래한 경강 상인에 대해서는 거의 처벌하려 하지 않고 쌀 폭동의 책임을 싸전 상인에게 전가하려 하였다.

이러한 비변사의 주장에 대해 형조(刑曹)에서는 경강 상인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반발하였다. 형조에서는 쌀 폭동을 조사한 결과 근본 원인은 곡식 유통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경강 상인에게 있다고 보았다. 형조에서는 효수형에 처해진 7명은 어찌 보면 먹을 것을 구하다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여서 죽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정부에서 상인들의 간사한 행동을 단속하지 못하여 우매한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경강 상인과 시전 상인은 7명의 목숨에 대응하는 형벌 을 받지 않았으니 매우 불공평하며, 한양의 민심이 전혀 수긍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강 상인 가운데 곡식을 가장 많이 쌓아 놓고도 유통시키지 않은 자와 미곡 거래를 중지한 싸전 상인을 찾아서 효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형조의 주장은 오히려 법 해석이 잘못된 것으로 비판받았다. 국왕인 순조조차 형조의 주장에 대해 “죄가 사형에 해당하면 사형에 처하는 것이지, 어찌 난민들의 울분을 풀어 주기 위해 사형에 처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9)『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 3월 계미. 그리고 그 책임을 물어 형조 판서 이면승(李勉昇)을 파직하였다.

그러나 당시 민심은 쌀 폭동과 관련해 7명이 효수당한 만큼 그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경강 상인과 싸전 상인들을 처벌하라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비변사에서도 여객 주인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 쌀 폭동의 책임을 물어 경강 상인과 싸전 주인을 조사한 끝에 모두 4명이 체포되었다. 동막(東幕) 여객 주인 김재순(金在純)과 하미전인(下米廛人) 정종근(鄭宗根), 하미전인 이동현(李東顯), 잡곡전인(雜穀廛人) 최봉려(崔鳳麗)가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쌀 폭동 책임을 물어 체포된 사람은 김재순과 정종근이었으며, 이동현은 도량형 부정으로, 최봉려는 화수(和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김재순과 정종근만 사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처리 결과는 진상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쌀 폭동 과정에서 경강 연변에서 불태워진 집이 15호나 되었는데도 경강 상인으로는 김재순 한 사람만이 지목되어 효수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발된 자 가운데 나머지는 모두 시전 상인이었고, 그것도 둘은 미곡 독점보다는 거래상 부정에 지나지 않는 도량형 부정과 화수죄로 고발한 것을 보면 경강 상인에 대한 정부의 제재가 민심을 위무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경강 상인 등을 철저히 재조사하라고 지시하는 와중에서도 경 강 상인에게 효유(曉諭)하여 적극적으로 무곡(貿穀)을 권장하는 한편, 각도의 관찰사와 강화·화성 유수에게 한양으로 곡물이 반입되는 것을 막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처럼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 정부는 한양의 원활한 미곡 유통과 흉년 구제책이라는 명분 아래 경강 상인의 영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하였고, 그 범죄에 대해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당시 경강의 여객 주인권을 궁방과 권세가가 다수 차지하고 있었으며, 정조 연간에 주교사를 설치한 이후 세도 정권 담당자와 경강 상인 사이에 일정한 결탁 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처럼 상인과 권력의 유착 관계가 깊어졌으므로 정부의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세기 들어서는 독점 상업에 대한 단속마저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 명분으로 독점 상업에 대한 단속이 오히려 원활한 미곡 유통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와 같은 정책은 겉으로는 상업에 대한 불간섭을 표방하여 모든 상인에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상인의 미곡 독점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는 18세기 시전 상인과 벌인 경쟁에서 경제력과 합리적 상술 등 경제적 능력을 무기로 우위를 장악한 경강 상인이 19세기 들어서면서 권력과 결탁해 이윤을 축적하는 방법을 선택하였음을 의미한다. 경영의 합리화나 다각화 등을 통하여 경쟁력을 확보하여 경쟁자를 압도하는 방식보다는 권력과의 결탁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19세기 이후 외견상 상업 발전이 부진해 보이는 데는 이러한 변화가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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