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5. 조선 후기 한양의 도시 문화
  • 여항인과 새로운 의식 세계
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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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계첩(金蘭契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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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도시 성격이 중세적인 왕도(王都)에서 상업 도시로 변모하면서 출현한 새로운 계층이 바로 한양의 중간 계층인 여항인이다. 여항(閭巷)은 원래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이 사는 골목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대개 ‘서울의 일정한 지식을 소유한 저자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양반 사대부를 제외한 하층 계층 전체를 일컫는 말로, 넓은 의미의 중인 계층이 주축을 이룬다. 시정인과 중인은 사회적으로 동일한 계층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비슷한 처지로, 통상 ‘우대사람(上村人)’으로 불렸다.

이들 중간 계층에 속하는 부류는 역관이나 의관 등 기술직 중인의 일부와 각사 서리나 겸종 등 경아전층(京衙前層), 대전별감·무예별감 등 액례(掖隷) 집단, 군영 장교·포교 등 군교(軍校) 집단, 승정원 사령·의금부 나장 등 관서 하례(官署下隷) 그리고 시전 상인 등이었다. 18세기 한양에서 중간 계층의 수는 기술직 중인은 1,700여 명, 경아전은 1,500명, 군영 장교는 4,005명에 달할 정도로 양적으로 매우 두꺼운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항인은 시전 상인층과 더불어 실무 행정을 맡고 있던 하급 관리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재상가나 권세가의 겸인(兼人), 차인(差人) 또는 호조 등의 재정아문 서리 등으로 행세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사대부와 같은 시간적 여유를 누렸고, 이를 통해 여항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항인은 주로 중세 사회 해체기 한문학의 한 변형으로 나타난 여항 문학 연구에서 취급되었다. 여항인에 대한 규정은 주로 신분과 직업적 동질성에 기초한 집단, 즉 경아전과 기술적 중인을 중핵으로 한 중간 계급이라고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여항인의 규정을 이처럼 신분적·직업적 규정으로 제한한다면 18세기 후반 한양의 도시화를 배경으로 나타난 도시 문화의 한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여항인의 주요 성격을 신분적·직업적인 측면에서 규정한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는 당시의 여항 문화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직업적·신분적 규정 외에, 상업 도시 한양을 배경으로 성장한 도시인이라는 관점을 보태야 여항인의 역사적 성격을 좀 더 분명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층은 조선 전기에도 이미 존재했으므 로, 후기에 들어 이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배경을 직업과 신분 규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여항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천수경(千壽慶)과 함께 여항인들의 문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을 편찬한 장혼(張混)은 가장 이상적인 삶을 “태평 시대에 서울에 살며 관료의 대열에 끼여 문자를 알고 샘물 흐르는 경승지에서 화목을 가꾸고 마음의 친구를 사귀며 좋은 책을 수장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였다.47)장혼(張混), 『이이엄집(而已广集)』 권14, 8책 평생지(平生誌), 부록(附錄).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태평 시대에 한양에 거주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사대부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산천경개가 뛰어난 곳에 은둔하는 삶을 이상으로 상정하고 추구한 것과는 매우 다른 지향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당대의 사대부들이 정치적 좌절 등의 이유로 낙향하려는 의식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여항인의 의식은 전형적인 사대부의 미덕인 귀거래사적(歸去來辭的) 지향을 거부하고, 한양에서의 현실적인 삶을 긍정하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기왕의 양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여항 문화의 도시적 성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들 여항인들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도시인으로서 자각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18세기 상업 도시 한양이 배출해 낸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여항인은 양반 사대부와는 기질이 완연히 달랐다. 그러므로 여항인이 추구한 가치도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 체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들의 세계관은 18세기 중엽에 성립된 새로운 문학 장르인 한문 단편 소설이나 새로운 대상을 읊은 한시(漢詩)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 작품 세계는 치부(致富), 남녀의 애정 갈등, 신분 동향, 군도(群盜) 형태의 민중 저항 등이 중요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상업 도시로 변모하던 한양을 공간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작품은 충효열(忠孝列)의 봉건적 강상 윤리에 매몰되지 않고 인 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감정을 인정하면서 인간성 자체를 긍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고, 정욕 문제도 도덕적인 규범으로 억제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상업 활동, 근면성 등을 통한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신분적 규범보다는 상업적 신용, 근면성 등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여 경제인으로서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조하였다. 또한 봉건 사회 해체기의 농민 분해로 무전무전농(無田無佃農)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저항을 긍정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 중심의 이념도 점차 변모하였다.

여항인이 이처럼 경제 활동과 인간 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의식에 도달하게 된 까닭은 이들이 상업 도시 한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유교 사회의 굴레가 여전히 완고했지만 도시적 삶이 그들에게 자유로운 의식을 지니게 하였다.48)고동환, 「18세기 서울의 도시 구조 변화와 여항(閭巷) 문화」, 『성곡논총』 30,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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