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4. 모습을 드러내는 평양 상인
이철성

개항을 전후한 무렵 평양 상인과 평안도 상공업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시대의 변화였다. 구한말 식산흥업(殖産興業)의 논의도 상업과 공업에 대한 인식을 빠르게 바꾸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평안도 지방의 상업 인식에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서북 사람들에게는 벼슬할 기회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상인이 사회 계층을 두껍게 형성하고 있었다.

한양과 경기에 대한 라이벌 의식도 강하였다. 잘 알려진 ‘평양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에도 한양에 대한 반감과 경쟁 의식이 예외 없이 짙게 깔려 있다. 김선달은 한양에서의 과거 급제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작심한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김달은 꾀를 내 서울의 고관대작들을 농락하고 ‘선달(先達)’의 첩지를 받아 든다. 또한, 김선달은 한양 상인이 ‘닭’을 ‘봉’이라고 속여 팔았다며 일을 꾸며 고향으로 돌아갈 노잣돈을 한양 상인에게 받아낸다. 그래서 얻은 별칭이 ‘봉이 김선달’이다.

대동강 물장수와 짜고 일을 꾸며 대동강 매매 문서를 작성하게 되는 계기도, 평양을 깔보는 한양 상인을 혼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허생을 통해 조선 사회를 풍자하듯 세간의 일화도 현실의 의식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사회 경제 분야의 평양과 한양 세력 사이의 경쟁 의식은 식민지시대까지도 이어졌고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의 이러한 정서가 근대 초기 서북 지방 상권 수호 운동이 다른 지방에 비해 남달랐던 배경을 이룬다. 1897년 진남포 개항과 함께 대거 이동한 일본 상인은 이 항구를 서북 지방의 제일 항구로 만들어, 이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곡물을 대량 수출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진남포를 일본 상인이 전혀 다른 나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일본화된 도시로 만들었다. 1899년 평양 개시장은 조선 상인의 위기감을 한층 높였다. 평양의 일반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미쳤다. 청일 전쟁 직후부터 농민들은 군용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농토, 가옥은 물론 묘소, 사우(祠宇), 재실(齋室)까지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1907년 신시가지 건설과 관련된 평양 외성(外城) 사람들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였다. “일병들이 집집마다 들어가 살아 평양 부민들은 반수 이상이 살 집을 잃었다.”라든가, “평양 외성 토지가 모두 정거장 기지 및 군용지로 경계가 지어져 토지와 가옥을 모두 잃었다.”는 호소가 터져 나왔다.69)「평양 감리 보고서(平壤監理報告書)」, 의정부 훈령 제15호, 광무 10년 5월 8일.

일본 상인과 일본 정책에 대한 반감이 자연히 높아졌다. 이에 4전 하는 일본인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7전씩이나 하는 한국인 목욕탕으로 몰려들었고,70)『한국 독립 운동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65, 1023쪽. 교회에는 1년에 16만 원씩이나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들이 1∼2전 하는 시장세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일본 측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또한 서북 지방 인사들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신민회의 활동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의주·납청정·안주․선천·곽산에도 교육 구국 활동의 하나로 학교가 설립되었다. 정주 납청정의 협성동사(協成同事), 용천(龍川) 양시(楊市)의 상무동사(商務同事)의 활동도 조선인의 상업 진흥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 자기 회사 설립은 민족 산업 진흥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때문에 1911년 날조된 ‘데라우치 총독 암 살 음모 사건’, 이른바 105인 사건 관련자 가운데 상공업자로 분류되는 53명은 전원 서북 지방 출신이었다.71)윤경로, 「105인 사건에 연루된 상공업자의 활동-기소자 중 상공업자의 업종과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5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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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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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李昇薰)은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나 평양을 무대로 활동한 대표적 상인이자 기업가였으며 민족 운동가였다. 그는 1864년(고종 1) 4월 25일 평안도 정주에서 이석주(李碩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자, 열한 살 되던 해에 납청정에 있던 임일권(林逸權) 유기점 사환으로 장삿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 넷 되던 1887년 무렵 이승훈은 철산 사람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유기점과 유기 공장을 개설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상점과 공장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판매망은 서북 전 지역을 석권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 전쟁은 서북 일대 경제 기반을 폐허로 만들었고, 이승훈의 사업 기반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이승훈은 다시 오희원의 자본을 빌려 재기하여 유기 공장을 복구하고 진남포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이때부터 거상 이승훈의 이름이 평안도는 물론 서울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01년 이후 그는 유기 공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合資)하여 대규모 무역상을 경영하였다. 인천항에서 수입되는 석유, 양약 등을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도․산매를 하였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하여 값이 오르길 기다렸다가 방매하여 큰돈을 모으기도 하였다.72)조기준, 「남강 이승훈의 기업 활동」, 『남강 이승훈과 민족 운동』, 남강문화재단, 1988.

이승훈의 사업이 확대일로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개항 이후 화폐 제도의 문란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값이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게 되자, 이승훈은 엽전 1만 냥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보내 시가 차익을 보려고 하였다. 서울에서 한 냥 하던 엽전이 부산에서는 두 냥씩 한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엽전을 실은 배가 목포 근해에서 일본 영사관 소속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고 말았다. 이승훈은 일본 영사관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조선 정부가 이승훈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는 없었다. 황해도의 수수와 함경도의 명태를 매점한 일도 가격이 폭락하여 손해를 보았다. 러일 전쟁 때에는 전시 특수로 소가죽 값이 치솟을 것이라 예상하고 물품을 매점하였지만,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 부득이 큰 손해를 보고 헐값으로 팔아 버린 일도 있었다. 평양 자기 회사의 설립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지만 이승훈의 상업상 실패 경험과 그 과정에서 겪었던 민족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산 안창호에게 감명받은 이후 그는 신민회의 핵심 인물로 평양 자기 회사뿐 아니라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이태리 파마양행과 직교역을 구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육 사업에도 적극 나서게 되었다.

이승훈은 조선도 몇 자본이 한데 합친 대자본이 있어야 외국의 상사(商社)와 상품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대자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서 재벌인 철산 오씨네와 안주의 김인오와 황해도의 김홍량 자본을 합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철산 오씨 가문이란 여러 대에 걸친 관서 갑부 오희순 가문을 말한다. 1908년 대동학교에 5,000원과 2,000원을 과감히 기부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오희원과 오치은이 이 집안 사람이다.73)『황성신문』 1908년 10월 29일자 논설 ;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9일자 논설. 오희원은 이승훈의 장사 밑천을 도와준 인물인데, 이후에도 이승훈과 함께 상무동사에도 관여하였다. 또 그는 철산(鐵山)에 창동학교(彰東學校)를 설립하고, 정주의 오산학교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의 단체인 태극학회에도 기부금을 냈다.74)『신동아』 5권 11호, 1935년 11월. 안주의 김인오는 평양에서 무역 상점을 차릴 때 이승훈과 연결되어 있던 인물이다. 이때 같이 참여했던 윤성운은 1900년대 객주 상회를 경영하였으며, 자금력을 지니고 신용이 높은 인물이었다.75)『한민족 독립 운동사 자료집』 1권, 국사편찬위원회, 1986, 270∼271쪽 ; 『한민족 독립 운동사 자료집』2권, 1986, 85쪽.

1909년에 설립된 평양 자기 회사는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지방 재력가들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평양 자기 회사의 창립 발기인은 이승훈, 한삼현(韓三賢), 윤재명(尹在明), 정인숙(鄭仁叔), 윤성운, 전재풍(田在豊), 이덕환(李德煥), 최유문(崔有文) 등이었다. 창립 총회에서는 사장에 이승훈, 총무에 김남호·정인숙, 감사에 김진후·최유문이 선출되었다. 불 행히도 이들 창립 발기인과 경영진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경영에는 큰 힘을 쏟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대로 대자본가 집안으로서 주단포목전을 운영하던 김남호(金南滈) 같은 인물도 있었고,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객주업과 제조업에 종사하여 평양 실업계의 사정을 꿰뚫는 정인숙 같은 인물도 있었다. 주주 가운데 안주의 김양수(金陽壽)는 주단포목과 곡물을 취급하는 무역상이었고, 진남포 박만화(朴萬化)는 삼화항(三和港)의 객주였다. 그 밖에도 의주의 최성률(崔聖律)과 최석하(崔錫夏)는 1912년에 설립된 평북 작잠 회사의 사장과 취체역(取締役)이었고, 박천의 변용각(邊龍珏)은 조합제로 개편된 평양 염직소의 조합원이었다. 평양의 김수철(金壽哲)은 1910년대 수인당(壽仁堂) 약방과 의약월보사(醫藥月報社)를 경영하였다. 또한 평양의 김용흥(金龍興)은 무역상, 양승호(梁承灝)는 주단포목 판매상이었다.

한편 평양 자기 회사와 관련된 상공업자 가운데는 박경석(朴經錫) 같은 실업가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도자기 회사를 경영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1915년부터 2년 동안 평양 자기 회사의 취체역을 맡았다. 또한 그는 일본인 자산가와 친하여 일본인 지배 회사의 대주주나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식민 통치에 협조하는 민간 대표직인 관선 부협의원(府協議員)·부참사(府參事)·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등을 두루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1920년 평양 조선 물산 장려회 발기인이기도 하였다.

평양 자기 회사의 취체역 임석규(林錫奎)는 한말부터 사업을 경영하면서 1920년대 가장 유능한 무역상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평안 무역 주식회사의 대주주이면서 봉천에 큰 무역 상점을 개설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는 평양 상업 회의소 평의원 상무 위원을 지냈는데 1914년 공공사업에 진력했다 하여 일제에게 목패(木牌)를 하사받은 경력도 있다. 포목상으로 대금업을 같이 경영하여 돈을 모은 김진모(金鎭謨)도 유력한 기업가였다. 가산 군수, 중추원 의관을 지낸 그는 재산이 많아 각종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6)오미일, 「1908∼1919년 평양 자기 제조 주식회사의 설립과 경영」, 『동방학지』 123, 2004.

평안도의 활달한 풍속을 배경으로 여성 갑부도 탄생하였다. 백선행(白善行)은 1848년 경기도 수원에서 백지용(白持鏞)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온 그녀는 열네 살에 안재욱(安載煜)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로 평생을 보냈다. 백선행은 평양부의 상업 수요를 기반으로 직포업, 바느질, 간장 판매 등으로 돈을 벌었다. 모은 돈은 주로 토지에 투자하였고 이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불렸다. 그 가운데 강동군(江東郡) 만달산(晩達山) 부근의 땅은 거간꾼에게 속아서 샀다고 하여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땅에는 시멘트 원료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에 매력을 느낀 일본인이 그녀에게 이 땅을 처음 가격의 열 배에 사들여 재산이 불어나기도 하였다.

백선행은 여성 평양 상인으로서 번 돈을 쓰지 않고 거부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를 거상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흔히 돈에는 세 가지 어려움, 즉 삼난(三難)이 있다고들 한다. 모으는 어려움, 지키는 어려움, 쓰는 어려움이 그것이다. 그런데 백선행은 쓰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그녀가 평생 모은 재산을 교육과 사회사업에 아낌없이 기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08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 다리를 놓았고, 1925년에는 시가 1만 3,000원 가치의 대동군(大同郡) 남곶면(南串面) 애포리(艾浦里) 논 1만 800여 평과 밭 3천 수백여 평을 평양 사립 광성학교에 기부하였다. 곧이어 그녀는 사립 숭현여학교에도 현금 3만 원에 해당하는 땅을 내놓았다. 1927년에는 창덕학교에 6,000여 원어치의 밭 1만 7,440평을 기증하였다. 평양의 신시가지에만 공회당이 있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1926년 평양부 내 채관리(釵貫里)에 땅 339평을 1만여 원에 사두었다가 돈을 더 내 재단 법인으로 공회당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77)『동아일보』 1925년 2월 28일자, 1925년 10월 26일자, 1927년 2월 1일자, 1927년 3월 16일자. 이 밖에도 그녀는 숭인상업학교와 다리 건설 등 각종 사업에도 거액의 재산을 내놓았다. 그녀는 근대 여류 갑부로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여장부였다.

이처럼 평양과 그 일대에는 개항 이전부터 여러 대를 이어 상업에 종사해 온 거상들이 있었다. 그리고 큰 장사치는 아니었으나 1890∼1900년대를 거치면서 거상의 대열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자본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제조업에 투자하거나 업종을 바꾸어 상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상업 조직을 만들기도 하고 자본금을 모아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상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뒤 이를 토지 매입에 투자하여 지주가 된 이들도 있었고, 대금업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자들도 있었다. 기업인으로서 사회 활동에 참여하여 민족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고, 사회사업에 기부하여 공익을 꾀하던 사람도 있었다. 반면, 사업 확장을 위해 일본 자본가나 관료와 친하게 지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이든 이들은 서북 지방의 역사적 전통을 배경으로 성장한 평양 상인이었다. 거상에게 민족의식이 당위적으로 부여되어야 하며 그것에 따라 자본의 성격이 판단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분명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만 상인의 역사적 맥락을 이으려는 우리에게 있어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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