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7. 만상의 무역 활동
  • 심양과 연경 사이의 모자 무역
이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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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쓴 조선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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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상의 무역 활동은 책문과 심양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경선(金景善)은『연원직지』에서 양털로 만든 방한용품 모자의 수입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모창(帽廠)이란 모자를 만드는 공장이다. 중국 사람이 쓰는 모자와 우리나라의 관모(官帽)가 모두 이곳 중후소(中後所)에서 생산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러 수천 입(立)에 이르는 모자를 예약해 사갔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에 들어갈 때 예약을 하고서 돌아올 때 실어 왔다.”98)『연원직지』 권2, 출강록, 12월 9일 모창기(帽廠記). 중후소는 산해관(山海 關)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있는 지명으로, 이곳에서 만든 모자가 가장 유명했는데,99)『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1편, 11월 15일. 18세기 후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입 물건 중 하나였다.

조선 정부가 역관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 모자를 수입해 올 자금을 역관에게 빌려 주고 그 돈의 일부를 사행 경비에 충당시키는 무역을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무역을 ‘관아에서 수입한 모자’란 의미에서 관모제(官帽制)라고 하였다.

역관이 수입한 모자는 서울의 모자전민·만상·송상에게 국내 판매를 위임시켰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자의 원가와 함께 일정량의 은화를 더 받아들임으로써 원금을 재확보하는 한편, 이윤을 남겨 임시 사행의 비용으로 저축하는 구조로 운영되었다. 모자는 척(隻)-부(釜)-죽(竹)-입(立)의 단위를 썼는데, 입을 기준으로 죽은 10립, 부는 100립, 척은 1,000립을 의미한 것으로 생각된다. 매해 1,000척의 모자를 구입해 오도록 했는데 조선 정부가 빌려 준 돈은 은화 4만 냥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모자는 한 사람이 삼동(三冬)을 지내는 데 필요한 물건으로 봄이 되면 해져 버리는 것이다.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화로 삼동을 쓰면 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내는 한정된 은화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다 갔다 버리고 있다.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짓인가.”100)『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월 22일.라고 하여 양털 모자 수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홍양호(洪良浩)도 “모자란 물건은 고금의 경사(經史)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천하에 있지도 않던 것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남자들은 관(冠) 위에다가 관을 더 쓰는 것이니, 이미 예법의 뜻을 잃은 것이다. 부녀자들에게는 비녀도 아니고 수건도 아니어서 진실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오직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찌 달리할 것이 없어서 하필이면 멀리 딴 나라에서 사와야 하는가.”101)『정조실록』 권16, 정조 7년 7월 정미.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도 수레를 이용하고, 벽돌을 사용하며 양을 길러 이용후생하자는 북학파(北學派)들의 논리로 이어진다. 이와 함께 관모제는 정 부에서 무역을 한다는 명분상의 비판도 감내해야 하였다.

이에 1777년(정조 1) 상인층에게 그들의 자본을 투입하여 모자 수입과 국내 판매를 전담하게 하고, 조선 정부는 수입되는 모자에 과세함으로써 외교 비용을 보충하려는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것이 세모법(稅帽法)이었다. 세모법은 모자 무역을 통해 외교 비용의 일부를 마련하는 제도였다는 점에서 관모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만상과 송상은 세모법으로, 이제 역관이 수입해 온 모자를 공급받는 상인에서 그들이 직접 자본을 투입하여 모자를 수입하는 무역 상인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만상의 역할은 더욱 많아졌다. 송상에게는 공식적인 연경행과 무역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만상이 국내에서 판매하는 모자의 수익도 컸다.

중후소에서 모자를 주문한 만상은 산해관을 넘어 최종 목적지 연경에 도달한다. 연경에 도착한 사행은 주로 회동관(會同館)에 머물렀다. 옥하관(玉河官)이라고도 불린 회동관은 모두 100칸 규모의 ‘일(一)’ 자 형태로 지은 남향집이다. 세 칸의 검은색 대문에서 중문을 지나면 행랑이 동서쪽으로 나 있다. 여기서 다시 작은 문을 지나면 정사가 거처하는 정당(正堂)이 있고 그 좌우에 비장과 수행 하인들이 머무는 행랑채가 있다. 정당 뒤채에 부사와 서장관이 거처했고, 맨 북쪽 끝에 방을 들이지 않은 헛간 같은 회랑에 임시로 온돌을 놓고 간이벽을 쳐서 하인과 마부가 거처하였다.

사행 일행은 연경에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는 의식인 표자문정납(表咨文呈納), 정사 이하 모든 정관(正官)이 홍려시(鴻臚寺)의 패각(牌閣) 앞에서 세 번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아홉 번 절하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연습하는 홍려시연의(鴻臚寺演儀), 사행 정관이 청나라의 황제를 알현하는 조참(朝參), 방물과 세폐를 바치는 방물세폐정납(方物歲幣呈納), 숙소인 회동관에서 열리는 하마연(下馬宴), 청나라가 왕과 삼사신·원역에게 하사차 주는 회송 예물(回送禮物)을 받는 영상(領賞), 떠나는 사신 일행을 위해 마련하는 상마연(上馬宴) 등 각종 사행 의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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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성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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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관 뜰에서는 이른바 회동관 개시가 실현되었다. 회동관 개시는 상마연이 끝난 뒤에 열렸다. 청나라 예부에서 관원이 나와, 상품의 불공정 거래자와 밀거래, 거래 금지 품목의 매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고시(告示)하였다. 고시 후 연경의 각 점포 상인(鋪商人)들이 화물을 싣고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감시관의 감독 아래 조선 역관과 상인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졌다. 이 회동관 개시 이후 사행은 청나라의 황제에게 떠나기에 앞서 사조(辭朝)하는 예식을 거행한 다음 귀국길에 올랐다.

회동관 개시는 이렇듯 규제와 제한이 있었지만, 연경에 도착한 상인들의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행 일행들은 연경의 천주교 성당인 동천주당과 남천주당을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서책과 그림, 골동품 가게가 즐비한 유리창(琉璃廠)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유리창 거리에서 벌어진 요술 구경도 조선 사행 사이에서는 볼 만한 구경거리로 알려져 있었다. 개싸움이나 닭싸움 같은 볼거리도 있었다. 사소한 무역은 사행이 연경에 머무는 기간에 비교적 자유롭게 일어났다. 하지만 연경의 중국 상인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조선의 수출품은 역시 인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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