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2. 개성 상인의 활동과 정신
  • 개성 상인의 출현
  • 조선시대의 개성 상인
정성일

개성 상인이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고려시대의 개성 상인은 수도 상인으로서 누리던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기반으로 하여 어쩌면 손쉽게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개성 상인의 운명은 많이 바뀌게 된다. 서울 상인의 지위에서 갑자기 지방 상인으로 전락한 개성 상인은 정치·경제·사회적 여건이 이전 왕조 때보다 더욱 열악해진 상태에서 상업 활동을 펼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악조건이었기에 개성 상인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졌는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의 개성 상인보다 조선시대의 개성 상인이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매우 역설적이다.

이성계(李成桂)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그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조선 건국 직후 새로운 정권에 협력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처형되었다. 특히 고려 왕족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심했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성이 왕씨(王氏)인 많은 사람들이 아예 성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 왕(王) 자에 점을 하나 더 찍어 옥(玉) 자로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람 인(人) 자를 덧씌워 전(全) 자로 만들거나 김(金) 자로 고치기도 하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과 고려의 관직에 있던 자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귀양을 보낸다 하여 배에 가득 싣고 가다가 배 밑창을 뚫어 모두 바다에 수장(水葬)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112)송경록, 『북한 향토 사학자가 쓴 개성 이야기』, 푸른숲, 2000.

조선 개국 초기 개성은 이처럼 매우 불안한 도시였다. 조선 정부는 개성 사람들을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개성 사람들이 다른 지방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통성명을 할 때 송도에서 왔다고 하면 ‘송도 쌍놈’이라 경멸을 당하기 일쑤였다. 개성 사람들은 개성을 떠나는 순간 과거 송도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은 버려야 했다. 세상이 변하여 더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대받는 설움을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으로 달래야만 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개성 상인이 출현하는 첫 번째 배경이었다.

개성 사람들 중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대로 개성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개성 출신자에게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도 봉쇄되어 있었다.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개성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농경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조선 전기에 이미 개성의 인구는 3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또 개성부의 호구 수가 1798년에는 6,299호로, 1824년에는 6,422호로 늘었다. 호당 인구를 다섯 명으로만 잡더라도 개성의 인구는 3만 명이 넘었다.

이에 반해 개성의 호당 간전(墾田) 면적은 0.95결로 1결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시기 전라도(11.5결), 충청도(9.8결), 경기도(9.6결), 경상도(7.1 결), 황해도(4.5결)의 경지 면적에 비하면 매우 낮은 편에 속했다.113)홍희유, 『조선 상업사』, 305쪽 ; 박평식, 『조선 전기 상업사 연구』, 201쪽. 이처럼 논밭이 부족한 자연 환경 때문에 고향에 남아야만 했던 개성 사람들은 상업의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114)실제로 19세기 초 개성에서는 전체 세입 6만여 냥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만 냥을 영업세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또 영업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무려 6,600냥이 부상대고들에게서 받아들이는 상세(商稅)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개성 지역이 차지하는 상인들, 특히 부상(富商)의 지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에 반영된 송상들의 도고 활동」, 『력사과학』, 1962, 54∼55쪽). 이것이 조선시대에 개성 상인이 출현하는 두 번째 배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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