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2. 개성 상인의 활동과 정신
  • 행상과 시전 상인의 경쟁
정성일

오늘날에는 상점을 나타내는 말로 마트, 마켓 같은 외국어를 많이 쓴다. 이런 용어를 써야만 왠지 세련미가 풍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말 대신에 점포라든가 전방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전통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 단어는 시전의 ‘전’과 점포의 ‘방’을 합쳐 부르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물건 파는 곳을 가리키는 ‘가게’라는 말도 임시 건물을 뜻하는 ‘가가(假家)’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시전 상인이 장사를 하던 전방에는 안쪽에 ‘퇴청’이라는 작은 방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장사를 하였다.

시전 상인은 특정 물품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난전, 즉 행상에 대한 감독권인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난전을 하다 시전에게 발각되면 시전 상인이 그 물건을 빼앗거나 관리에게 고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난전 금지 권한을 남용한 시전의 행패 때문에 지금의 남대문과 동대문 근처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금난전권의 행사는 요즈음 말로 하면 시장 원리에도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폐해를 남겼다.132)김영수, 「한국 자본주의 가치관의 역사적 전통 : 조선시대 개성 상인의 상업 활동을 중심으로 한 고찰」, 143쪽. 그러자 1791년(정조 15)에 정부는 육의전을 뺀 나머지에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아무나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하였다. 신해년에 시행된 통공(通共) 발매 정책이 바로 이것인데 이것을 줄여서 신해통공 (辛亥通共)이라 부른다.

소상인과 도시민의 반발을 명분으로 삼아 실시한 신해통공의 이면에는 시전 상인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상인의 출현이 숨어 있었다. 조선 정부가 그동안 시전 상인에게 난전 금지 권한을 준 이유는 시전 상인이 정부에 상당한 돈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전 상인을 통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상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상인들을 가리켜 ‘사상 도고(私商都賈)’라 불렀다. 이들은 주로 서울에 상품이 들어오는 길목을 장악하여 장사를 하였다.

대표적인 사상의 거점으로는 포천의 송우점, 삼남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송파, 한강 연안의 마포·용산·뚝섬 등이 있었다. 이들 사상은 서울 안의 이현(梨峴)·칠패(七牌)의 소상인과 지방의 개성 상인과 연계하여 뛰어난 자금력과 우수한 조직망을 토대로 시전 상인 대신 서울의 상품 유통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전 상인들과 달리 직접 생산지로 달려가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여 그것을 다른 지역에 판매하였다. 또한 손님을 끌기 위해 돈을 들여 놀이판도 벌였다. 송파장의 ‘송파 산대놀이’라든가 ‘양주 별산대놀이’의 유래가 이와 관련이 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신해통공 이후 시전의 횡포는 줄어들었으나 대신에 사상들의 독점 행위가 큰 문제가 되었다. 시전의 횡포를 없애기 위해 시행된 신해통공 이후에도 사상의 상품 유통업 장악으로 사상에 의한 매점 매석의 폐해가 심각하였다. 더군다나 19세기 이후 세도 정권 아래서 정부는 사상과 결탁하였다. 사상의 독점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폐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울과 개성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사상들의 상행위는 관이 주도하는 상업 활동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유 상업이 발전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133)김영수, 「한국 자본주의 가치관의 역사적 전통」,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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