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2. 개성 상인의 활동과 정신
  • 개성 상인의 정신과 기질
  • 개성 상인의 대명사, 임상옥
정성일

개성 상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임상옥(林尙沃)이다. 그런데 임상옥이 태어난 곳은 개성이 아니다. 그는 1779년(정조 3) 12월 10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855년(철종 6) 5월 29일 77세의 고령으로 그는 의주 본제(本第)에서 사망하였다. 자(字)는 경약(景若), 호(號)는 가포(稼圃)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본래 평안남도 안주에서 거주하다가 그의 증조 때에 의주로 옮겨왔다. 선대부터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아버지 임봉핵도 당시 중국의 서울이던 연경(燕京)을 왕래하던 상고(商賈)였다고 한다.137)양정필, 「19세기 개성 상인의 자본 전환과 삼업(蔘業) 자본의 성장」, 49쪽. 그런 그가 개성 상인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임상옥이 거상(巨商)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과 그가 개성 상인의 대표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펼친 중국과의 홍삼 무역 때문이었다. 임상옥의 문집인 『가포집(稼圃集)』 자서(自序)에 따르면 그는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배워 15세에 이르러 문리가 트이기 시작하였고 18세 되던 무렵부터 연경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임상옥의 예에서 보듯이 당시 중국과 무역하던 상인들이 최소한의 학식은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여튼 인삼 무역으로 거부를 한 손에 거머쥔 임상옥의 재력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일화를 통해서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집에는 서사(書師)만 7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임상옥이 거상으로 성장한 39세에 조상의 묘소 아래에 대하(大廈)를 지었는데 크기가 수백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와 평안 감사, 의주 부윤이 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일행이 무려 7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많은 인원이 먹을 요리를 각상으로 하여 일시에 들였다고 한다. 임상옥의 재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이처럼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홍삼 무역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것과 함께 순조 연간의 세도가 박종경(朴宗慶)과 깊은 인연을 배경으로 하여 그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인삼 무역의 독점권을 얻어 냈다는 정치적 배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하여튼 1913년에 만들어진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 19세기 초반 인물인 임상옥이 게재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후세에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138)『조선신사대동보』, 900∼901쪽 ; 양정필, 「19세기 개성 상인의 자본 전환과 삼업 자본의 성장」,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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