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3. 동래 상인의 활동과 정신
  • 동래 상인의 출현
정성일

한반도는 지리적 조건이 무역 활동을 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북쪽으로는 중국 대륙과 이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일본 열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북방의 대륙과 남방의 해양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와 정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외침을 받기 쉬운 단점도 있다. 그러나 국제 관계를 잘 활용하여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적절한 정책을 펴서 대외 무역에 힘을 쏟는다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욱 윤택해 질 수 있는 것이 반도(半島)의 유리한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을 잘 활용하여 상업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람들이 곧 의주 상인이요 동래 상인이다. 의주와 동래는 각각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양대 관문(關門)이다. 그런데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요즘처럼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고, 재화와 자본의 이동 역시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파견하는 사행단(使行團)의 일원으로 뽑힌 사람들만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가는 외교적 선물인 예물(禮物)과 여행 경 비 충당을 위한 약간의 상품만이 무역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무역의 이득(gains from trade)을 국가 권력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환이나 교류에 민간인이 참여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대륙과 해양의 문물을 흡수하는 통로가 국경 지대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의주나 동래 같은 관문 지역은 외국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이었으며, 무역품과 국제 정보가 집적되는 물류의 중심지이자 외래 문화의 집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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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경
동래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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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는 상인들을 가리켜 동래 상인, 즉 내상(萊商)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동래 출신은 아니지만 동래 지역에서 활동하는 상인들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동래 상인이라는 고유 명사가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아마도 조선이 들어선 이후일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동래 상인의 출현은 동래 지역에서 상업이 시작되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래 상인이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유력한 지방 상인의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동래 상인이 우리나라 상업계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는 일본과의 무역 관계 때문이다. 동래 지역은 일본과 가까이 있어서 오랜 옛날부터 일본과 교류하는 거점이었다. 그런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배를 이용하여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근대 이전에는 동력선이 아니라 바람과 해류의 방향에 크게 영향을 받는 돛단배, 즉 범선(帆船)이 이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바다로 항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부산에서 직선 거리로 불과 54㎞ 떨어져 있는 대마도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컸다. 대마도의 북쪽 끝에 있는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부산 시내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과 야경을 볼 수 있다. 맑은 날 높은 산에 오르면 낮에도 대마도에서 부산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부산과 가장 가까운 대마도 북쪽 지역에 가면 “한국 휴대 전화가 터진다.”는 얘기는 이제 대마도를 찾는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관광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지리적 근접성을 이용한 두 지역의 경제 교류는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하여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에도 일본과 물품을 교역하였는데, 사신의 왕래를 통한 외교적 선물 교환의 형식을 빌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일본인들은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왜구(倭寇)인데 이들 때문에 한반도 연안 주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에 극심하였다.

세종 연간에 이르러 조선 정부는 왜구에 대한 강경 진압과 함께 회유책으로 그들에게 통교(通交)를 허용하는 정책을 폈다. 군사적 대응과 더불어 무역이라고 하는 경제적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침략자(raiders)인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인 무역 상인(traders)으로 변신시키려던 조선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적중하였다. 이것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 관계를 구축한 점에서 한일 관계의 역사적 진보인 동시에, 우리나라 상업사(商業史) 측면에서 보면 동래 상인의 출현을 가져온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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