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상인의 계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동래 기영회(東萊耆英會)는 동래 지역 무청(武廳)의 퇴임자가 조직한 만동회(萬同會)와 작청(作廳)의 퇴임자 조직인 대동회(大同會)가 합병되어 만들어진 조직이다. 1846년에 기영계(耆英契)로 출발한 동래 기영회는 150년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현재는 사단법인 동래 기영회로 존속하고 있다.150)김동철, 「『동래부상고안』을 통해서 본 19세기 후반의 동래 상인」, 139쪽 ; 김동철, 「150년 전통을 이어온 동래 터줏대감들의 계모임, 동래 기영회」,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1999, 125쪽.
『동래부상고안』에 등재된 동래 상인들 중에도 동래부의 무임(武任)이나 향리직(鄕吏職)을 역임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경력을 통해 살펴보면 동래 상인 중에서 가사리상고의 지위가 가장 낮고, 전인이 그 다음이었으며, 상고가 가장 높은 지위의 경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곧 동래 상인 내부에서 이미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상고와 전인 중에서 동래 기영회에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동래 기영회 내부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 기영회에 가입한 회원 중에서는 개화 초기에 교육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동래 기영회가 중심이 되어 1906년 3월 삼락학교(三樂學校)를 설립하였다. 그 뒤 1907년 11월에는 삼락학교에 개양학교(開揚學校)가 흡수되어 사립 동래동명학교(東萊東明學校)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동래 상인의 후예들이 중심이 되어 근대화 초 기 동래 지역의 애국 계몽 운동을 이끌어 간 것이다.151)김동철, 「『동래부상고안』을 통해서 본 19세기 후반의 동래 상인」, 140쪽, 143쪽.
한편, 일본에서 건너온 대마도 사람들이 거주하던 왜관은 외교와 무역을 위한 공간 이상의 구실과 기능을 발휘하였다. 왜관을 통해 드나드는 것은 조선의 역관과 상인 그리고 그들이 소지한 물품만이 아니었다. 조선과 일본의 음식 문화와 복식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 바로 왜관이었다. 심지어는 두 나라 사람들의 정신 세계와 가치관에 대한 정보까지도 왜관을 통해 교환되었다.
한 예로 이학달(李學達, 1770∼1835)의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에는 19세기 전반에 왜관을 통해 전해진 일본인의 습속과 문물이 동래와 김해 지역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본식 문양으로 그려진 부채를 들고 다닌다거나, 일본 양산을 들고 거리를 거니는 아낙네가 목격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수입한 종이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일본제 모기장으로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식 전골 요리(스키야키)며 국수(소면)와 귤을 찾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는 일본의 무력을 상징하는 칼(日本刀)을 차고 다니는 것을 호쾌하게 여기는 사람조차 있었다. 그런가 하면 김해 낙동강 연안 포구 사람들은 일본인이 좋아하는 오리를 잡아 그것을 왜관에 팔기도 했다고 한다.152)김성진, 「부산 왜관과 한일 간 문화 교류」, 『한국 문학 논총』 22, 1998, 61∼65쪽 ; 김성진, 「19세기 초 김해인(金海人)의 생활을 침식한 왜풍(倭風)」, 『지역 문학 연구』 3, 경남지역문학회, 1998 ; 김동철, 「조선 후기 왜관 개시 무역과 동래 상인」, 『민족 문화』 21, 1998, 73∼75쪽.
이런 풍속의 변화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왜관을 통해서 드나드는 새로운 문화와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나날이 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을 전통 지배 질서만으로 억누를 수 없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