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2. 철도로 보는 근대의 풍경
  • 식민지에서 시작된 철도 문명
박진희

조선에 처음으로 기차를 소개한 이는 김기수(金綺秀)였다.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는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일동기유(日東記遊)』에 처음으로 철도를 접한 소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러 량의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 차의 바퀴가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차체는 안온(安穩)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초목·가옥·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하므로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려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신교까지 도착하였으니, 그 거리가 95리나 되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화륜차(火輪車)’는 수신사 일행에게 번개같이 사람을 날라다 주는 서양 문명의 이기였다. 조선보다 한발 앞서 일본은 이 서구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여 교통 혁명을 일으켜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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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세계사적 격랑(激浪) 속에서 동양 3국이 취한 길은 서로 달랐다.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던 청나라는 1842년 영국과 맺은 ‘난징 조약’으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구미 제국주의 세력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1854년 미일 수호 조약으로 개항한 일본 메이지 정부는 1868년 막부 정부를 무너뜨리고 ‘서양 따라잡기’ 정책을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추진하면서 동양의 강자로 떠오른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 치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일본은 서구의 우월한 물질·기술 문명에 맞서기 위해 이질적인 문화를 적극 수입했다. 일본과는 달리 청나라와 조선은 신구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서양의 문물을 재빨리 흡수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구 근대화를 표절한다. 포함(砲艦) 외교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해 문을 열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서양에게 배운 수법을 이웃 나라 침략에 써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구 기술을 바탕으로 일찍이 공업화로 들어선 일본은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과 청나라를 지배함으로써 산업 자본의 확장을 꾀하게 된다. 이런 지배의 첫걸음으로 주목한 것이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권 장악이었다.

일본이 철도 부설을 위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일을 벌이고 있었는가는 철도 부설 지역에 대한 사전 탐사 작업을 통해 알 수 있다. 1885년 1월 일본은 마츠다 코조(松田行藏)라는 일본인 기사를 보내 사전에 철도 부설 지형을 탐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약 4년 동안 국경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 교통 및 경제 상황 전반을 세밀하게 조사하였다. 그에 이어 철도국 장관의 추천으로 들어온 카와노 텐즈이(河野天瑞)는 조선 조정의 협조 아래 부산에서부터 탐사를 하였다. 이 두 사람에 의해 일본은 1892년에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에 관한 상세한 도면을 작성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탐사한 거리는 모두 240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청일 전쟁 기간 중에는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확보하고자 일본은 철도 기사 센세키코(仙石貢)를 조선에 보내어 경인·경부 철도 예측 선로를 탐사하도록 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4년 8월의 ‘한일 잠정 합동 조관’을 통해 경인·경부 철도 부설권을 일본이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정약을 받아낸다. 그러나 미국·러시아·영국 등 일본과 마찬가지로 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했던 열강들의 반대로 경인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한다. 주미 공사 이하영(李夏榮)의 후원을 받고 있던 미국인 모스(J. R. Morse)가 경인 철도 부설권을 따게 되고, 그가 설립한 경인 철도 회사에 의해 1896년 조선 최초의 철도가 될 경인 철도 부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스는 일본의 집요한 매수공작과 자금난으로 결국 1897년 일본에 부설권을 이관해 버리고 만다. 이어 일본은 경부 철도 부설권을 빼앗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의 고관대작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1898년 9월에는 ‘경부 철도 합동 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 조약은 지엽적인 부분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의 의견이 반영되기는 했지만, 철도 부설권과 철도 영업권 및 철도 용지를 무상으로 일본에 공여하도록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렇게 부설권을 독점한 일본에 의해 1899년 9월 19일, 처음으로 화륜차가 다니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기도 한 경인선은 일본이 해외에 부설한 최초의 철도이기도 하다. 이 철도로 일본은 일본인 거류지 인천항에서 곧바로 서울로 들어가는 길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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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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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부설한 철도임을 공포하듯이 경인선 개통식이 있던 당일에는 인천항에 거류하는 일인들이 저마다 집에 국기를 세우고 만세와 평화 등을 기원하는 불꽃놀이용 축포 23발을 터뜨리며 자축을 하였다고 한다. 비록 일제의 침략 의도가 배후에 깔린 철도 개통식이었지만, 처음으로 화륜차를 타 본 조선인들에게 이것은 일대 장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899년 9월 19일자 『독립신문』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 준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를 각기 방 한 칸씩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철구로 연하여 수미상접하게 이었는데, 수레 속은 상중하 3등으로…….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대한 이수로 80리 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였는데 그곳 정거장에 배포한 범절은 형형색색 황홀 찬란하여 진실로 대한의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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