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2. 철도로 보는 근대의 풍경
  • 철도 부설을 통한 식민 지배의 강화
  • 철도가 가르쳐 준 새로운 규율
박진희

신분의 와해와 같은 해방의 기쁨뿐만 아니라 철도는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말을 타고는 한 달이 걸려서나 가능했던 유람을 손쉽게 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정거장 주위의 산야·온천·바닷가가 동네 뒷산·개울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 여행지에 제일 먼저 들어선 이들은 일본 거주민들이었다. 철도 운행이 늘어나면서 조선인들도 이들 여행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행 붐은 조선인을 위한 여행 안내서가 발간되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1923년 3월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조선 철도 여행 안내사를 차리고 조선 철도 여행 책자를 정기적으로 발행했다고 한다.

철도가 이렇게 즐거움만을 선사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시간에 매이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도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규율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철도는 이전의 말들이 지나다니던 대로에서처럼 느릿느릿 지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무게가 몇 백 톤이나 나가며, 마차보다 몇 배나 빠르게 달려오는 육중한 기관차는 이런 느릿함이나 부주의는 용납하지 못하였다. 기관차와의 충돌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도 운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 사고 기사가 신문의 한 귀퉁이를 정기적으로 차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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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5월 24일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남만주 철도 회사 경성 관리국에서 철도 사고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이전 9년 동안에 1390명이 철도 사고로 사상(死傷)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10분의 1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대개가 20∼40대로 집 밖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철도 사고가 늘어나자 이에 대한 대비책이 강구되기 시작한다.

1938년 철도국에서는 일주일 동안 경찰관의 인도에 따라 모든 조선인 에게 선로 보호와 교차점 보호 훈련을 일제히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철도 사고 방지를 위한 선전 열차를 운행하자는 계획이 나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철도 사고 방지를 위한 영화를 만들어 개봉하였는데, 이 영화 관람에 동원된 사람이 1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문명의 이기 철도는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흉기로 다가왔다. 선로를 건너기 위해서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긴장을 해야 하는 등 새로운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을 새로 익혀야 했다.

경인선·경부선·경의선이 거대한 몸체와 속력으로 국토를 관통하기 시작할 무렵, 철도를 매개로 한 신문명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결과적 양상들을 그대로 몸에 새겨가면서 기차를 체험했다. 그것은 기술 문명의 신기(神奇)였고, 또한 민족적인 아픔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근대의 새벽이 지나간 철로 위에 이내 식민의 아침이 지나간 것이다.

철도는 조선에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가능성이었고, 식민지라는 특수 상황이 빚어낸 질곡과 왜곡의 현실이었다. 이 현실에서 철도는 식민지 조선인의 삶을 덮친 양날의 칼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근대 문명의 축복이었다. 철도는 자연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세계의 막을 내렸고 인간이 자연 위에 등극하는 장을 열었다. 무너지고 있던 신분 질서의 해체를 가속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식민지 철도는 근대의 축복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 전역에 기차라는 밀정을 파견했고, 식민지 주민을 얽어 맬 촘촘한 그물을 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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