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4. 조선 지식인의 과학 기술 읽기
  • 경부 철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김태호

근대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한 견해 차이는 보건 의료뿐 아니라 철도·전신·전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불거졌다. 특히 철도는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은 일본 기술진의 손으로 건설되어 1905년 정월 초하루부터 민간인 승객을 실어 날랐다. 서울(서대문)에서 부산(초량)까지 완행은 30시간, 급행은 10시간가량 걸렸다. 요즘의 기준으로는 느림보 기차일 테지만 당시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빠른 속도였다. 최남선(崔南善)은 1908년 경부선 기차를 탄 감상을 창가(唱歌)에 담아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를 발표했다. 처음 두 연은 다음과 같다.

우렁차게 吐(토)하는 汽笛(기적) 소리에

南大門(남대문)을 등지고 떠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形勢(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어 앉았고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內外親疎(내외친소) 다 같이 익혀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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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철도 노래
경부 철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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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최남선의 눈길을 끈 것은 기적 소리와 속도로 표상되는 기차의 힘이었다. 또 근대 서양의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 맞추어 설계된 기차 안의 공간은 반상(班常)과 남녀의 구분이 사라진 ‘조그마한 딴 세상’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다다른 부산은 ‘수입 수출 통액(通額)이 일천여 만 원/입항 출항 선박이 일백여 만 톤’에 이르는 근대적 항구로 탈바꿈해 있었다(제58연). 그에게 이런 변화들은 대체로 조선 사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는 바람직한 징조였다.

비록 일본인 거류지의 번화한 모습을 보면서 부산항이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 보이’는 것을 슬퍼하고(제63연), ‘食前(식전)부터 밤까지 타고 온 汽車(기차)/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남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쉬워하지만(제66연), 그 아쉬움이란 단편적인 감상에 머물 뿐이었다. 기차의 편리함이 열어 줄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더 컸던 것이다.

하지만 기차가 반갑지 않았던 이들도 있었다. 공주(公州)는 조선 후기 내내 충청 지역의 상업·교육·교통의 중심지였다. 일본이 경부선의 노선을 결정할 때에 공주 사람들은 유서 깊은 자기네 고장을 가로질러 흉물스러운 철길이 놓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 기술진은 공주 대신 당시 허 허벌판이나 다름없었던 한밭, 곧 오늘날의 대전(大田)에 역을 지었다. 서울과 부산, 서울과 목포를 잇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된 대전은 경부선 개통 4년 만에 1500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는 등 눈부시게 성장했고, 공주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충청권 제일의 도시 자리를 대전에 내주어야 했다. 비슷한 예로 경부선의 조치원과 호남선의 논산은 철도와 함께 새롭게 일어난 반면, 해운과 상업의 요지였던 강경은 호남선의 개통과 함께 쇠락을 면치 못했다. 이처럼 철도는 한반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일본 자본과 기술이 침투하는 통로가 되었고, 기존 상권이 해체되고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이들에게 철도는 더욱 노골적인 억압과 폭력으로 다가왔다. 한반도의 철도는 대부분 유사시 병력과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려는 일본의 복안에 따라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경의선(1904년 완공)은 처음부터 러일 전쟁을 대비하여 군용으로 건설되었다. 전신 또한 병력의 효율적인 수송과 배치를 위해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일본에 항거하여 의병 투쟁에 나선 이들에게 철도와 전신은 자신들의 목줄을 죄는 두려운 것이었다. 허공에 매어 달린 전깃줄이 의병의 움직임을 낱낱이 보고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을 따라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또 기찻길이 들어설 곳에 사는 농민들은 느닷없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기도 했다.

이들은 이에 항의하여 철로의 버팀목을 빼어 감추는가 하면, 집단적인 소요를 일으켜 철도 부설을 저지하고자 했다. 철도가 완공된 뒤에도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지거나 총을 쏘고, 선로에 방해물을 놓고, 정거장에 불을 지르는 등 저항 행위가 계속되었다. 극형도 서슴지 않는 일본의 강경한 진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철도 운행 방해 작업은 그치지 않았고, 때로는 의병 운동과 결합하여 발전하기도 했다. 조선인에게 철도와 전신이 가져다 준 괴로움과 두려움은 최남선이 느꼈던 관념적인 아쉬움과는 차원이 다른, 삶과 죽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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