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2. 과학 기술 활동의 형성과 발전
  • 기업과 대학의 연구 활성화
송성수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활동은 1970년대까지 과학 기술의 연구와 교육에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던 반면, 1980년대부터는 과학 기술의 위상을 강화하면서 연구 개발 활동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80년을 전후하여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면서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첨단 산업으로의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을 통해 과학 기술이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었으며, 정부 출연 연구 기관 이외에 기업과 대학의 연구도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국가 정책에서 과학 기술이 차지하는 위상이 대폭적으로 강화되었다. 1970년대에 유행했던 ‘수출 입국’이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대신하여 1980년대에는 ‘기술 입국’ 혹은 ‘기술 드라이브 정책’이 강조되었다. 기술 드라이브 정책은 기술 혁신이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는 역할에서 한 걸음 나아가 경제 성장을 선도하는 능동적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국가 통치권자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가용 자원을 최대한 투자하여 우리의 기술 수준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경제 발전을 이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정책 수단으로는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을 들 수 있 다. 1982년부터 과학기술처(현재의 과학기술부)가 시작한 특정 연구 개발 사업과 1987년부터 통상산업부(현재의 산업자원부)가 시작한 공업 기반 기술 개발 사업(현재의 산업 기반 기술 개발 사업)은 대표적인 예이다. 1970년대까지의 과학 기술 정책은 전략 산업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술 수요를 간접적으로 충족시키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1980년대부터는 정부가 핵심 기술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을 통해 관리하는 좀 더 직접적인 형태를 띠었다. 반면에 산업 정책의 기조는 1986년에 공업 발전법이 제정되는 것을 전후하여 기존의 산업별 육성 정책이 기능별 지원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은 부처별로 다원화되었다. 1991∼1995년에 정보 통신 연구 개발 사업, 환경 기술 개발 사업, 건설 교통 기술 개발 사업, 농림 수산 기술 개발 사업, 보건 의료 기술 연구 개발 사업 등이 잇따라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모든 정책 분야에서 과학 기술의 위상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동시에 과학 기술과 관련된 국가의 정책이 분산적인 방향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기술 혁신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조율하는 것이 강조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정부 연구 개발 사업은 상호 조정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양적으로 팽창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민간 부문의 연구 개발 투자와 기술 혁신 활동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연구 개발 투자에서 정부와 민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3년부터 역전되기 시작했으며, 기업 부설 연구소는 1981년에 53개에 불과했던 것이 1991년 4월에는 1000개를 넘어섰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민간 주도의 기술 혁신 체제가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정부의 강력한 개입과 지원을 바탕으로 민간 기업의 연구 개발 활동이 촉진되었다.

정부는 1980년대 이후에 민간 기업의 연구 개발 활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정부 연구 개발 사업에 대한 참여를 촉진하는 가운데 금융·세제·인력 등에 대한 지원 시책을 대폭적으로 강화해 왔다. 특히 1981년에 정부가 기업 부설 연구소 인정 기준을 정하고 연구 개발 인력에 대한 병역 특례 제도를 실시한 것은, 다른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조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업 부설 연구소의 팽창을 배경으로 기업체 연구원의 수는 1981년 2086명에서 1991년에는 3만 1186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 기관에 이어 기업체에 근무하는 과학 기술 인력이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자 사회에서 중요한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기업체 연구원의 양적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질적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1990년을 기준으로 기업체 연구원의 약 70%가 학사 출신이었으며, 박사 학위 소지자는 5% 정도였다. 이에 따라 첨단 기술 분야의 연구 개발 활동은 극히 소수의 연구소에서만 수행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기업 부설 연구소에서는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기존의 기술을 개량하는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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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공과 대학 전경
포항 공과 대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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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에는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의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 이상의 교육 기관은 팽창, 전문대학은 정비, 실업계 고등학교는 내실화의 경향을 보였다. 대학생의 수는 인문계가 자연계보다 훨씬 큰 폭으로 팽창했는데, 그것은 인문계가 시설 투자에 대한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자연계의 경우에도 대학생의 증가에 비해 교수 요원과 연구 시설의 확보가 충분히 병행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자연계 교육이 연구보다는 교육에 중점이 주어졌고 수업 방식도 실험보다는 이론 위주로 진행되는 경향이 지속되었다. 한국 과학 기술원과 함께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의 발전을 촉진한 교육 기관은 1986년에 설립된 포항 공대였다. 포항 공대는 포항 제철(현재의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우수한 교수·시설·학생을 확보하여 짧은 기간 내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공계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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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가속기 연구소
포항 가속기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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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공대가 설립된 이후에 국내의 다른 대학들도 ‘연구 중심 대학’을 표방하면서 경쟁적으로 연구 개발 활동을 촉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포항 공대는 포항 제철, 산업 과학 기술 연구소(현재의 포항 산업 과학 연구원)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서 실질적인 산학연 협동이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1991∼1994년에는 포항 공대 내에 세계적 수준의 방사광 가속기가 건설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거대과학(big science)의 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대학의 연구 개발 활동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것은 1990년을 전후하여 발생한 일이었다. 정부의 기초 과학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는 것을 배경으로 대학도 주요한 연구 개발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부는 1989년을 ‘기초 과학 기술 진흥의 원년’으로 선포한 후 같은 해에 기초 과학 진흥법을 제정하면서 기초 연구 진흥을 위한 투자 확대, 연구 활동에 대한 지원 확대, 기초 연구 기 반의 선진화, 산학연 연계 강화, 경쟁적 연구 풍토 조성 등 기초 과학을 진흥하기 위한 다양한 시책을 개발하였다.

정부의 기초 과학에 대한 지원은 대학의 연구 단위를 육성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한국 과학 재단의 우수 연구 센터 지원 사업과 한국 학술 진흥 재단의 대학 부설 연구소 지원 사업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영재 교육을 통해 차세대 과학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강조되었다.

1983년부터 전국의 각 지역에 과학 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85년에는 한국 과학 기술 대학(현재의 KAIST 학사 과정)이 설립되었다. 또한 1997년부터는 주요 대학에 과학 영재 교육 센터(현재의 과학 영재 교육원)가 설립되어 우수한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별도의 과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로써 과학 영재 교육원·과학 고등학교·이공계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과학 영재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었지만,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으로 인하여 과학 영재 교육이 충분한 역할은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활동은 1960년대 이후에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정부 기구·연구 기관·교육 기관·지원 기관이 갖추어졌다. 또한 1980년대 이후에는 정부의 기술 개발 지원 제도가 정립되고 기업 및 대학의 연구가 활성화되는 등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활동은 좀 더 종합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과학 기술 활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과학 기술 활동이 성장하면서 연구 개발을 담당하는 주체도 정부 출연 연구 기관에서 기업과 대학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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