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3. 북한 과학 기술의 어제와 오늘
  • 지하 벙커에서 열린 과학원 창립 총회
김근배

광복 직후, 북한은 과학 기술 육성과 과학 기술자 양성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건국을 전후하여 김책 공업 대학·흥남 공업 대학·평양 의학 대학·함흥 의과 대학·청진 의과 대학·원산 농업 대학 등 이공계 교육 기관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최고 권위의 김일성 종합대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은 것은 과학 기술계 학과였다. 1951년 초에는 한참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연구 기관이자 지도 기관인 과학원이 창립되었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의 과학 기술 전담 정부 부처인 과학기술처가 생긴 1969년보다 20년 가까이 이른 때였다. 과학원의 창립총회는 당시 수상이었던 김일성과 북한의 저명한 과학자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하 벙커에서 개최되었다. 또 매년 수백 명씩 파견된 소련 유학생들의 전공도 대부분 과학 기술이었다.

북한이 이처럼 과학 기술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던 까닭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북한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자본가들이 건설한 중공업 설비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 경영자들은 고급 기술이 필요한 자리에는 일본인 기술자만을 고용했기 때문에 광복 후 이를 운영할 수 있는 조선인 고급 기술자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 공업 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을 하루 빨리 육성할 필요가 있었다. 또 과학 기술 인력의 확충은 곧장 산업 생산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었으며,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장기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과학 기술 발전이 갖는 사상적 인 파급 효과였다. 사회주의는 기존의 사상들이 관념적인 데 비해 스스로를 과학적인 사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학적 사상인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온 국민이 과학적 사고를 체득하고 미신과 관념론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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