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
  • 3. 북한 과학 기술의 어제와 오늘
  • 주체 섬유 비날론
김근배

월북 과학 기술자들이 북한의 과학 기술에서 차지한 중요성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합성 섬유 ‘비날론’의 개발 과정이다. 비날론은 1939년 일본 교토 제국 대학에서 연구 중이던 리승기(李升基, 1905∼1996)가 개발한 합성 섬유의 이름이다. 1930년대 말 미국에서 나일론(nylon)이 발명된 뒤 세계의 과학 기술 선진국들은 앞을 다퉈 합성 섬유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리승기가 개발한 비날론은 세계의 눈길을 끌었고, 리승기는 업적을 인정받아 박사 학위, 일본 특허, 교토 제국 대학 부설 화학 섬유 연구소의 교수 자리까지 손에 넣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제국 대학에서 교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론 화학자 이태규(李泰圭)와 그, 단 둘뿐이었다.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리승기의 발명은 일본에서는 실용화되지 못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서울 대학교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비날론 연구를 계속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정부는 리승기에게 함경남도 흥남 화학 공장의 설비를 활용하여 비날론의 공업화를 추진해 줄 것을 청했고, 리승기는 그 청을 받아들여 서울 대학교에서 길러낸 제자들을 이끌고 북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상이나 정치적 견해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연구 환경을 찾아 떠난 길이었다. 리승기와 제자들은 6·25 전쟁 중 미군의 폭격을 피해 평안북도의 지하 벙커에서 비날론의 공업화 연구를 마무리했다. 북한 정부는 이들의 연구를 돕기 위해 북한에서 교육받은 젊 은 연구원들을 합류시켰다. 젊은 연구원들은 리승기와 제자들이 교토와 서울에서 쌓아 온 풍부한 경험을 배울 수 있었고, 뒷날 북한 과학 기술을 짊어지는 재목으로 성장했다.

비날론의 공업화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북한 정부는 비날론 공장 건설을 결정하고 흥남을 공장 부지로 선정했다. 흥남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 기업이 건설한 화학 비료 공장이 있었으므로 인접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1961년, 첫 삽을 뜬 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아 1년에 2만 톤 이상의 비날론을 생산할 수 있는 거대한 공장이 완공되었고, 새 공장에는 ‘2·8 비날론 공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리승기는 원사(박사보다 높은 등급으로, 소련의 학제를 본받아 만들었음) 학위를 얻고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한 과학 기술의 우두머리로 활약했다.

비날론 공업화에는 월북 과학 기술자들의 지식과 일본인 자본이 건설했던 흥남의 공업 설비라는 두 가지 요소가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 두 요소를 한데 묶어 비날론 공업화라는 목표를 이뤄낸 것은 북한 정부의 과감한 중공업 육성 정책이었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 들어 이웃한 두 사회주의 대국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는 격렬한 이념 분쟁이 일어났고, 또 북한 안에서는 각각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에 의해 김일성의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이들과의 치열한 권력 투쟁을 거쳐 정국 주도권을 가까스로 지켜낸 북한 지도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북한은 더 이상 소련을 뒤따르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뚜렷이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자립 노선은 경제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소련은 북한이 코메콘(COMECON)으로 대표되는 국제 사회주의 분업 체제 안으로 들어와, 원자재와 설비를 동구권으로부터 공급받는 대신 소비재를 생산할 것을 바랐다. 그러나 자립 노선을 추구하게 된 북한의 지도부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중공업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결정 이후에 거둔 가장 큰 성 과가 바로 2·8 비날론 공장의 성공적인 건설이었다. 친소파(親蘇派)의 반발을 무릅쓰고 중공업 육성 정책을 추진했던 북한 지도부는 비날론 공업화의 성공을 더없이 자랑스럽게 여겼다.

비날론 공업화의 성공은 과학 기술의 내용 면에서도 자립이 가능하다는 징표였다. 북한 지도부가 보기에 비날론은 자립 노선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기술이었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선 비날론 생산의 원천 기술은 북한 사람인 리승기가 개발한 것을 그의 제자들이 다듬은 것이었다. 또 비날론의 기초 원료는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회석이었으므로 비날론을 만들기 위해 원료를 수입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비날론 섬유는 흡습성이 높아 우리 민족 전래의 옷감인 면(무명)을 대신할 수 있었다. 결국 비날론은 기술·원료·용도 모든 면에서 자립적인 기술로 간주되었다.

과학 기술계 일각에서는 이런 점들을 높이 사 비날론을 ‘주체 섬유’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과학 기술의 다른 분야에서도 ‘주체’라는 개념, 또는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정치 영역에서 주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보다 몇 년 이른 일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주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쓰인 분야는 정치가 아닌 과학 기술이었던 것이다. “과학 기술의 성과가 주체 사상의 정식화로 이어졌다.”고 하면 지나친 주장이겠지만, 적어도 “과학 기술의 성과가 정치 영역에서 주체라는 이념을 제기하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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